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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곽정은이 방송에 함께 출연한 가수 장기하를 두고 “침대에서 어떨지 궁금해진다”고 발언해 파문이 일었다. 사람들은 이 발언이 명백한 성희롱 혹은 성폭력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화자가 남성이었고 대상이 여성이었다면 그 남성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을 것이라며 곽이 이에 응당하는 책임을 지지 않으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된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건 평소 진보적인 관점을 견지해온 다수의 여성도 이 논점에 기대 비판에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일부에선 이 ‘다수의 여성’이 ‘명예 남성’의 지위에서 곽정은에 대한 비판에 합류한 것 아니냐고 역비판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현상은 언뜻 보기에 긍정적인 면이 있다. 사회가 구조적으로는 여전히 여성에 대해 차별을 가하고 있다 하더라도, 인식과 담론의 영역에서는 남녀평등 관계가 기계적인 균형이나마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확인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주체와 객체의 자리를 바꿔가면서 서로 처지를 생각해보는 행위는 관계를 합리적으로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요소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이 관점이 가지고 있는 맹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성폭력에 대해 논할 때 시선을 주로 ‘성’에 두고 성의 ‘훼손’에 대해 분노하지만, 정작 ‘폭력’을 둘러싼 관계는 외면한다. 성폭력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은 성보다는 폭력이다. 폭력은 주로 사회적 권력관계나 물리적 힘의 차이를 도구 삼아 상대적으로 무력한 피해자의 존엄성을 물리력이나 언어로 붕괴시키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런 관점을 곽정은 발언에 대입해보면, 우선 곽정은과 장기하의 물리적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 그러므로 곽이 장을 무력하게 할 사회적 권력관계가 있지 않은 한 성폭력은 성립되기 어렵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남성들의 비슷한 발언은 사회적 권력관계가 없는 사이에서도 물리적 힘의 차이에 의해 실질적인 위협이나 폭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 문제에서 남녀의 기계적 균형은 평등의 관점이 아니라 사유의 부재를 표상한다.

폭력보다 성의 관점에 매몰된 시선은 한국 사회에서 성 보호 담론이 과잉 표상되는 현상도 낳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대체로 직접적인 폭력 피해보다 ‘몸이 더렵혀졌다’는 시선의 폭력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최근의 한국 사회에선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기준이 피해자의 ‘싫다’는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기준은 이런 혐오 감정에 의해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관점으로 비판 없이 승인되면서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사회적으로 매도하는 식으로 무분별하게 확장됐다. ‘싫다’는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했음에도 그런 행위나 발언을 반복해서 하는 이들이야 당연히 처벌해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감정의 잣대만으로 ‘가해자’에게 곤욕을 치르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직장 상사나 갑을 관계의 ‘갑’인 사회적 관계인들 사이에서는 권력 격차가 명확해 ‘싫다’는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수의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이런 케이스에 해당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사회적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운 이들 사이에서도 혐오 감정만으로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력의 개념이 무분별하게 확장되고 있다. ‘피해자’의 감정에 편승해 ‘가해자‘에 대한 매도에 합류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어쩌면 곽의 발언에 대한 비판에 합류한 다수 여성도 이런 경험에 기반을 뒀을 지도 모른다.

현상은 늘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최근의 한국 사회는 어떤 사건을 둘러싸고 성찰하기보다 그 사건의 ‘가해자’를 색출해 사회적으로 매도하고 굴복시키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얻는 데 더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타자를 굴복시키는 행위를 통해 자존감을 확인하고 자신은 굴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 재빨리 안도하는 현상이 지배적인 사회가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곽정은 발언을 둘러싼 담론이 무분별한 성 보호 담론의 확장을 제어하면서 성보다 폭력의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성찰되어야 하는 건 그런 까닭에서다. 곽정은이 그렇게 하지도 않았지만, ‘가해자’가 굴복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방송대학보>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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