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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순 글래머’는 한국 남성이 욕망하는 전형적인 여성상이다. 몸은 빵빵하고 얼굴은 예쁘되 남성을 압도하지 못하는 수동성을 지닌 여성. 그런 한국 사회에서 ‘당당하다’는 평을 호평으로 듣는 여성은 흔치 않다. 가수 이효리는 그런 흔치 않은 여성 중 하나다. 이효리는 섹시함과 당당함을 공유한 스타임에도 팬층의 지지는 젠더를 막론한다.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여성 역시 한국 사회에서 환대받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가 그렇듯, 여성 역시 권리를 요구하는 주체로 나서는 순간 배척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가수 이효리에게는 정치적 발언마저 트렌드로 만드는 힘이 있다. 채식을 하고 동물권을 외치는 이효리의 행동은 채식의 철학과 동물 보호의 정치 위에 세련된 스타일을 입힌다. 심지어 직접 기른 작물을 먹고사는 귀농의 삶 위에도 트렌드를 칠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해고 노동자 문제다. 이효리는 70m 굴뚝에서 고공농성 중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을 응원하며 “해고자들이 복직하면 비키니 입고 춤이라도 추겠다”는 글을 18일 트위터에 남겼다. 노동 문제는 한국에서 정치적 갈등이 첨예한 최전선이다. 그는 여전히 당당함이나 세련됨으로 호평받을 수 있을까?

 

우선 이효리의 말을 들어봐야 했다. 1년쯤 전 제주도에 이주한 뒤로는 처음 하는 일간지 인터뷰다. 한달음에 달려가 지난 19일 제주시 장전리 하루하나 카페에서 만난 이효리는 그러나, 당당함보다는 자신의 선택이 미칠 파급을 걱정하는 얼굴로 “그 트위트를 쓴 뒤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 제주도 생활은 어떤가요?

= 너무 만족하고 있어요. 진짜 사람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전에는 제가 직접 하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제가 다 하게 되죠. 빨래라든지 집안 청소, 개들 미용까지 제가 하고요. 먹는 것까지 제가 키워서 먹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저라는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게 사람 사는 맛이 아닌가 싶어요.

- 하루 일상이 어떠세요?

= 일어나자마자 요가를 하고,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해서 신랑(가수 이상순)과 먹어요. 개들 산책을 한 시간 시키고 난 뒤 신랑은 음악 작업을 하고 저는 그림을 그린다든지 자유 시간을 가지죠. 저녁 해먹고, 영화 한 편 보고 자요. 그림은 원래 좀 좋아했는데 바쁠 때는 그릴 틈도 생각도 없었어요. 제주도 와서 여유가 생기니까 그리게 됐죠. 자수도 조금씩 하고요. 작물은 가지나 호박, 오이, 무, 배추같이 쉽게 먹을 수 있고 키우기 어렵지 않은 것들 위주로 재배해요. 식료품을 살 때는 마트보다 5일장으로 많이 이용하고요. 이런 일상이에요.

‘사회적 발언’ 이효리

“왜 나는 ‘좌효리’라고 불릴까

자기 생각을 밝히면서

돈보다 생명이 먼저라고 말하면 좌인가?

‘그럼 나는 좌가 맞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죠”

- 유기농 재배는 2~3배의 노력이 필요하다고들 해요.

= 저희는 대량으로 생산하거나 판매의 목적이 아니니까요. 좀 못 생기거나 작거나 그래도 상관이 없으니까, 그렇게 힘든 건 없었어요. 저희는 유기농이라고 해도 농사일이라기보다 방치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씨 뿌려놓고 아무것도 안 한다고 봐도 되죠.

- 그래도 자라나요?

= 되더라고요. (좌중 폭소) 저는 너무 신기했어요. 키우는 게 되게 힘들 것 같은데, 의외로 그냥 물 좀 주고 그러면 정말 오이가 나오는 거에요. ‘자연이 너무나 신기하다’ 생각했죠.

- 최근 인증받지 않고 유기농 콩을 판매한 일이 논란이었어요.

= 한 달에 한 번 이 카페에서 직거래 장터를 열어요. 반짝반짝 착한 가게라고. 저는 이제까지 안 입는 옷이나 그런 것들을 팔았는데, 저희가 재배한 콩이 저희가 다 먹기엔 너무 많아서 처음으로 주민들에게 판매를 한 거에요. 유기농으로 키운 게 맞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들 하니 ‘유기농’이라고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 생각했는데 그걸 누가 보고 민원을 넣어서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분들이 조사를 나오신다고 하더라고요. 심장이 막 두근두근했어요. 저는 살면서 형사 소송에 휘말린다거나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제가 혐의를 다 시인했으니 한 번 조사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저희 밭에서 일했던 인부들도 조사하고 토양을 퍼가서 조사하시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연예인이다 보니 그분들도 되게 부담스러워하시는 것 같아요. 큰 처벌이 내려질 것 같지는 않은데, 이번 일로 아무래도 제가 살기가 빡빡해졌다고 해야 하나요. 자기 검열이 좀 심해지고, 조심스러워졌어요.

- 민원 넣은 분이 일베 회원이라는 보도가 있었죠?

= 네, 무슨 ‘좌효리 빠이빠이’라고 쓰셨던데요. 저는 궁금해요. 왜 나는 좌효리라고 불릴까. 자기 생각을 밝히면서 다 같이 사회에 관심을 갖자고 말하고 돈보다 생명이 먼저라고 말하면 좌인가? 그럼 나는 좌가 맞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죠. 정치색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동물 보호를 하고 하는 게 아닌데, 그런 면이 좀…억울했어요.

 

- 분위기를 바꿔서 어린 시절 얘기를 좀 해보죠.

= 서울 사당동에 이수시장이라고, 아빠가 시장 골목에서 이발소를 했어요. 4남매 여섯 식구가 방이 하나 딸린 이발소에서 일도 하고 생활도 했죠. 방이 2평도 안 됐어요. 살기가 매우 버거웠죠. 아빠는 틈틈이 시장에서 과일 좌판을 했어요. 노점 단속을 나와서 과일 좌판을 막 엎어버리고 하는 모습이 어린 시절의 강력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이발소 건물 주인이 나가라고 하면서 아빠가 새벽 5시에 인력사무소에 나가는 모습도 봤고요. 중·고교 때까지 줄곧 어렵게 생활했어요. 대학 1학년 때 갑자기 연예인이 되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된 거죠.

‘인간’ 이효리

“유치원도 못 갔어요

친구들이 모두 유치원 가면 혼자 놀았죠

중·고교 때까지 줄곧 어렵게 생활했어요

저희 식구들은 그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 막내라서 부모님이나 언니, 오빠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건 아닌가요?

= 부모님이 함께 일을 하시니까 대화를 한다거나 케어를 해주신다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어렸을 때는 큰언니가 봐줬고, 조금 크면서부터는 모든 걸 제 스스로 해결했죠. 유치원도 못 갔어요. 친구들이 모두 유치원 가면 저는 혼자 돌아다니며 놀았죠. 막내라서 부모님에게 찡찡대며 애교를 부린다거나 했던 경험이 없었어요. 저희 식구들은 그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 그런 환경이 효리씨의 지금에 영향을 어느 정도 끼쳤나요?

= 저는 돈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분이나 멸시당해 힘들어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보면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불끈불끈 솟구쳐 오르고 막, 그런 마음이 있죠. 동물 보호를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던 것 같아요. 제일 약한 것이 동물이니까요.

- 그런 환경에서 연예인의 삶을 선택한 이유는요?

= 어렸을 때는 그냥 ‘아 나는 돈을 많이 벌어서 정말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야지’라는 쪽으로 시선이 더 갔죠. 완전히 올인했죠, 10~15년. 그러면 부유하지 못해서 힘들었던 것들이 모두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계속 마음속에 공허함이 생기고, 그다지 행복한 것 같지도 않고, 계속 불안했죠. 어느 순간 ‘아, 이건 아니구나’ 싶었고, 그때부터 저만의 시각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요.

- 어린 시절부터 “쟤 섹시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뭇 소년들의 성적 판타지 대상이었는데요.

= 저는 그런 시선들이 좋았던 것 같아요. 저를 뭔가 우러러보는 것 같고. 어디 가도 더 대접받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불편해졌어요. 광고 같은 것을 찍으면 광고주들이 “가슴을 더 모아라”와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죠. 그런 요구를 받으면 너무 상품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들어서 되게 기분이 안 좋았어요. 27~8살 때쯤이었죠. 그런데 더 나중에는 어차피 돈을 주고 나를 팔면서 뭔가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지키려고 하는 모습 자체가 좀 모순같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광고를 하지 말아야겠다 했어요.

- 어느 순간 매트릭스를 탈출한 거군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계 때문에 여전히 견딜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탈출보다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해요.

= 네. 그런데 어차피 개선의 여지가 없는 거니까요. 우리는 돈을 받고 광고주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시스템이니까….


  

- 효리씨는 자신의 정치적 변화에 대해 솔직하게 드러내요.

= 저는 그런데 사실 진보가 뭐고 보수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편하게 강자 편에 서기보다는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할 말을 하고 사는 것이 진보라고 한다면 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성향이 있었어요.

- 트렌드를 세팅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 제가 정혜신 박사님께 심리 테스트를 받아본 적이 있는데, 5감이 특별히 뛰어나다고 해요. 촉이 남달라서 그냥 해도 그게 곧 유행이 되고 그런 게 있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예전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동물 보호 등과 관련한 발언을 할 때는 생각보다 따라와 주지 않더라고요. 전에는 제가 뭘 하면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그래서 ‘아 이제 내가 이런 걸 하면 사람들이 이걸 많이 해주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쪽 분야는 반응이 적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인기가 있을 때 더 일찍 시작할 걸’(좌중 폭소) 했죠. 예전에 좀 더 일찍 이런 걸 알았다면, 사람들이 더 나를 좋아할 때 그때 내가 시야가 넓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어요.

- 사람들이 여전히 가수 이효리나 방송인 이효리를 보고 싶어해요.

= 앨범 작업은 계속 하고 있어요. 곡도 쓰고 가사도 쓰고 그래요. 그런데 최근 종영된 ‘매직아이’를 오랜만에 하면서 예전에는 못 느꼈던 것을 많이 느꼈어요. ‘공중파 예능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다. 시청률이나 광고가 따라붙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내가 진짜 궁금한 이야기를 물어볼 수도 없고, 내가 진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도 없다.’ 그러면서 공중파 예능에 대한 회의가 많이 느껴지더라고요.

‘연예인’ 이효리

“공중파 예능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다,

시청률이나 광고가 따라붙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그래서 회의가 많이 느껴지더라고요”

- 그럼 가수 생활은 공연 위주로?

= 그렇게 꼭 한정 짓고 싶진 않지만 이 상태로 생활하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웃음) 뭐 아이돌 위주로 돌아가는 TV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이젠 사실 그렇고요. 지난번 활동 때도 그런 곳에 나가는 게 불편했어요. ‘1번 눌러주세요’라며 투표해달라고 호소하고 이러는 게 사실 음악과는 아무 의미와 연관성이 없는데, 방송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 하니까요. 왜 해야 하지? 이러면서도 말이죠. ‘아 이젠 이런 데 못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효리씨는 동세대 여성들에게 당당함, 솔직함, 가식 없음,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 등의 평가를 받아요.

= 솔직한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어요. 삶의 모토 자체가 ‘솔직하자’에요. 그런데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거나 ‘당당하다’ 이런 면에서는 사실과 다른 면이 많아요. 저도 어렸을 때 부모님 사랑을 크게 받지 못하고 자랐고, 칭찬보다는 많이 혼나면서 자랐기 때문에 계속 그런 사랑에 대한 갈구가 있어요. 사실 연예인에겐 그런 게 큰 원동력이긴 하거든요. 계속 사랑받고 싶기 때문에 노력을 하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그런데 제가 얼마 전 그런 생각을 했어요. 블로그를 하고 사회 활동을 하는 것도 ‘내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야. 자연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야. 사람을 아끼는 사람이라고’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죠. 유기농 콩 사건도 그렇고, 이런 복잡한 일들을 만드는 것이 사실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계속해서 이렇게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요. 진짜 나를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그냥 내려놓고 나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죠. 그런데 아직까지 그렇게 모든 걸 내려놓지는 못하겠어요.

- 어린 시절의 그 기억들을 결핍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어렸을 때는 정말 돈이 너무 없었어요. 학교에서 체육복을 사오라든지 실로폰을 가져오라든지 하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어 창피했던 기억? 그런 것이 굉장히 너무 큰 기억으로 남아 있고요. 부모님이 아무래도 힘드니까 자주 싸웠죠. 아버지가 얼마 전에 얘기하시더라고요. 이발사가 예전에는 좀 멸시받는 직업이었대요. 자기는 일보다 멸시받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해요. 그러면서 저는 엄마와 몇 달 동안 따로 나와 살기도 했죠. 그런 기억들이 아무래도 결핍 같은 것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이효리’ 인생의 변곡점

“4집 앨범 사기 당한 뒤 1년여 쉬었어요

임순례 감독님 만나면서 ‘카라’ 활동했고요

동물 보호하면서 몰랐던 세계 눈 떴어요.”

-핑클 시절이 1기 이효리라면, 솔로 활동 때가 2기 이효리이고, ‘소길댁’은 3기 이효리인 것 같습니다. 그 변화는 대중의 원하는 모습에 맞춰가는 걸까요, 아니면 스스로 변화한 걸까요.

=그걸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 삶은 제가 주체적으로 바꿔왔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대중의 눈에서 자유로웠느냐 한다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쩌면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해야 대중의 사랑을 계속 받을 수 있는지를 나도 모르게 계속 찾아서 변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요즘 들었어요. 물론 그렇게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싶진 않지만, 제 마음속 한켠에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중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사실 영원히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야, 라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들어요.

-동물 보호 등과 같은 사회적 발언을 하게 된 변곡점은 언제인가요.

=제가 4집 앨범 때 사기를 당하면서 1년 정도 쉬었어요. 진짜 잘하고 싶고 더 올라가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앨범을 준비했고, 앞뒤 재지 않고 막 달려가다 보니까 그런 사기도 당했죠.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을 1년 정도 가졌어요. 많이 걷기도 하고, 처음으로 혼자 여행도 다니고. 동물 보호도 시작하게 됐고, 몰랐던 세계에 대해 눈을 떴죠. 그 전에는 주변이 모두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뿐이었어요. 누구 한 명 브레이크를 걸어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요. 모두 다 그냥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쉬면서 임순례 감독님을 만나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알게 됐죠. 처음엔 그 동물보호단체 ‘카라’에 갔는데, 사람들이 정~말 촌스러운 거에요. (좌중 폭소) ‘아 이렇게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이런 데 모여있는 거구나’ 했고, 이질감이 들었죠. 그런데 계속 만나고 얘기를 나누니까 너무 좋은 사람들인 거에요. 그러면서 제 생각이 하나 둘씩 깨져간 거겠죠.

‘소길댁’ 이효리

“장필순·윤영배 선배에게 음악·라이프스타일 영향 받아

자연에 순응하고 욕심없이 음악하며 사는 모습 행복해 보여

가진 건 많지 않아도 나누려는 모습도 멋있어

제동 오빠나, 남편 때문에 변한 건 아니에요.”

 


-그 당시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성찰을 한 건가요, 아니면 접했던 텍스트들이 있나요.

=새로운 쪽에 관심이 생기니까 막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어서 스스로 찾아본 것들이 많아요. 책이나 다큐멘터리, 독립영화들. 그러다 보니까 좋은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어요. 제주도 이웃인 장필순 선배님이나 윤영배 선배님 등에게 음악이나 라이프 스타일에도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자연에 순응하고 욕심 없이 음악 하면서 사는 모습이 정말 편하고 행복해보였어요. 가진 게 많진 않아도 나누려는 모습도 정말 멋지다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제가 변한 것이 제동 오빠 때문이다, 남편(가수 이상순) 때문이다, 말하기도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그 둘은 오히려 제가 그냥 편안하게 살길 바라죠. 꼭 누구 때문에, 특히 여자는 남편 때문에 변했다 이런 것도 한국 사회에서 유독 많이 하는 말 같아요. 꼭 주변 누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변할 수 있고 변화된 삶을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상적이었던 책이나 다큐멘터리가 있었다면요.

=책은 헨리 소로의 <월든>, 헬렌 니어링 스콧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을 읽고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영화는 용산 참사를 다룬 김일란 홍지유 감독님의 <두 개의 문>, 고 이성규 감독님의 <오래된 인력거>가 있었고, EBS에서 방송했던 <하나뿐인 지구>도 기억에 남네요.

-제주도로 거주 공간이 바뀌면서 변화한 것도 있나요.

=여기서는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거든요. 그 시간도 제게 큰 변화의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흙탕물 안에 뭐가 있는지 몰랐다가 가만히 두고 침전물이 가라앉으면 정작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보이는 것처럼, 떨어져 사는 것이 그런 계기를 주죠.

‘쌍용차’와 이효리

쌍용차 해고자 관련 트위터 오랫동안 고민

굴뚝 농성 보고 “복직되면 비키니 입고 춤을…” 게재

 

-쌍용차 해고자 관련 트위터는 어떻게 올렸나요.

=아주 오랫동안 고민을 했어요. 그분들이 굴뚝에 올라가기 전부터요. 지난해 12월인가, 쌍용차 사장님이 ‘연간 12만대 이상 팔리면 복직을 생각해보겠다’고 인터뷰하신 걸 보고 ‘그럼 내가 광고 모델을 해서 잘 팔리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제가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해본 것은 아니지만, 모든 걸 포용하고 사랑하는 자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누구를 깎아내리고 잘못을 지적하고 막 그러는 건 오히려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런데 두 분이 굴뚝에 올라가신 걸 보고 조금 앞당겨서 트위터에 글을 남겼죠. 트위트 올리기 전에도 망설였는데, 해고자들이 정말 복직되는 것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회사가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을 원하는 건지 몰랐으니까요. 복직을 원하면 제가 하는 행동이 맞지만, 단순 복직이 아니라 사과를 받는 게 우선이면 티볼리(쌍용차의 신차)가 잘 팔려서 복직되는 건 의미가 다르니까요. 그래서 제 행동이 누가 되진 않을까, 그분들이 자본과 맞서는 숭고한 정신을 내가 자본으로 해결하려 하면 잘못된 생각이지 않을까 걱정을 했어요. 그래서 해고자 분들께 여쭸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올렸죠.

-2심 판결에 견줘서 대법원 판결에 문제가 많았으니까 걱정하는 분들도 있었죠.

=네, 저도 그런 문제 지적도 다 봤어요. 그런데 그 판결이 옳든 아니든 이미 판결이 났으니까, 옳지 않다고 투쟁하는 게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사회에서 노동권 문제는 정치적 최일선이에요.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용산 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 영화를 보고 정말 큰 분노를 느꼈거든요. 막 때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맞는 사람들 옆에 서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어요. 노란 봉투 때도 그랬고요. 만약 노동자들이 회사를 막 때리는 상황이라면, 저는 회사 입장에 설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약한 사람 도와주고 불쌍한 사람 도와주라고 배웠는데, 왜 사회에 나와서는 그런 사람들을 도우면 ‘좌빨’ 소리를 듣고 욕을 먹고 그러는 지 모르겠어요. 그냥 사람이라면 연민의 마음이 당연히 있는 거고요. 모든 사람에게 그런 감정은 있겠죠. 다만 그런 것들이 다른 것들에 의해 많이 가려지니까 발현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저는 다른 사람보다 그게 더 큰 것 같아요.

이효리의 ‘소신’

“영화 <두 개의 문> 보고 큰 분노 느껴

약하고 불쌍한 사람 도와주라 배웠으면서,

왜 그런 사람을 도우면 ‘좌빨’이 되는지…

제 행동이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어

선뜻 뭔가 하지 못한 분들에게 원동력 됐으면”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불행을 보면 너무 힘들어서 외면하기도 하죠.

=네, 맞아요. 안 볼 때도 있어요. 그런데 제 성격은 외면하지는 못하는 성격인 것 같아요. 몰랐으면 몰랐지 알고는 그걸 외면하진 못하는 성격이어서요. 그리고는 힘들죠. 힘겨운 사람들을 보면서 힘든 거죠. 보면 힘든 데 안 보면 더 힘들고, 마음이 불편하고 잠을 못 자겠어요. 그런데 막 그렇게 당차고 여전사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어제도 쌍용차 관련 트위트를 쓰면서 밤새 악몽에 시달렸어요. 안 좋은 기사들이 터져서 사람들이 나를 막 욕하고 하는 그런 불안감이 있었나 봐요. 그냥 그런 보통의 사람이죠.

-글을 써보는 건 어떤가요.

=제가 말주변이나 글 주변이 별로 없어서요. 대신 시를 좀 좋아해요. 시를 조금씩 쓰고 있는데, 가사를 쓰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쓰는 거죠.

-그 중에 하나 정도 소개해주세요.

=‘not for sale’이라는 제목이에요. ‘한걸음 한걸음 마음을 딛고 올라가는 등산의 참맛도 모른 채 등산복만 팔았네/ 화장 안 한 말간 얼굴의 어여쁨도 모른 채 화장품만 팔았네/ 힘겨운 삶의 무게 술 한잔으로 겨우 달래는 노동자들의 고단한 속도 모른 채 술만 팔았네/ 내 존재의 이유인 소중한 가치도 모른 채 여기저기 이름만 팔았네/ 이젠 함부로 팔지 않으리’ 뭐 그런…. 유치해요.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것 같아요.

=네, 예전의 저를 생각하면서 쓴 거죠.

-고공농성 중인 두 분께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올라가셨을 때도 올라가신 분들 보고서 ‘힘내십시오’ 이러기도 뭐하고, 춥냐고 물어보는 것도 지겨우실 것 같고요. 그냥 손 내밀고 있다고 얘기해드리고 싶어요. 혼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트위트를 쓰고 그랬던 거니까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저는 망설였지만, 굴뚝에 올라가신 두 분이나 김의성 배우같이 이렇게 자기의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행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용기를 얻었어요. 제 이런 행동이 또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어서 마음만 함께했지만 두려움에 선뜻 뭔가 하지 못하신 분들에게 원동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됐으면 좋겠어요.

 


2시간 동안의 인터뷰가 끝나고, 이효리 부부는 취재진을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집에 초대했다. 4마리의 개와 3마리의 고양이가 엄마가 오니 세상이 떠나가라 짖거나 갸르릉대며 주위를 맴돌았다. 이효리는 굴뚝 위 이창근·김정욱과 화상 통화로 인사를 나누며 서로 수줍어하기도 했다. 굴뚝 위의 이창근·김정욱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벽난로에 나무로 불을 지펴놓고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불을 쬐던 이효리는 문득 5년 전 심리 상담 때 “효리씨가 효리씨를 사랑해줘야 해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솔로 활동에 열을 올리면서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인정과 사랑을 갈급하며 앞만 보고 내달리던 그때였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오늘,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효리가 효리를 사랑하는 일에 성공한 것 같아요.”


*<한겨레> 2014년 12월 22일, 23일치에 실렸음. 사진 김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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