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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올렸던 블로그 글 ‘샤를리 엡도 이후: 언론의 자유가 곧 비판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니다’나 각종 다른 글로만 간접적으로 샤를리 엡도를 접하는, 프랑스어를 한 줄도 읽지 못하는 나는 많은 이들이 샤를리 엡도를 일컬어 ‘모든 권위와 체제에 저항하기 때문에 좌파 잡지'라고 말하는 설명들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모든 권위에 저항해야 하고 모든 체제에 저항해야 하는 것인가. 모든 권위와 체제에서 자유로운, 온전한 개인들의 아름다운 관계로 이뤄진 사회는 과연 가능한가. 권위는 권위주의와 동일한 개념인가.

나는 일정한 권위는 체제를 돌리는 데 있어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체제를 배제하자는 말은 어쩌면 그냥 차별을 하자는 말과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체제없는 온전한 개인들의 아름다운 관계는 가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그 가능성은 중간계급들 안에서만 열릴 것이다. 배제된 자들은 체제가 없으면 그 관계 안에 진입할 수 없다. 한국에서 왜 유독 이런 고답적 자유주의가 ‘좌파’로 호명되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테러는 테러다: 프랑스 vs. 이슬람 관극틀의 문제점’(나는 이 글의 제목 ‘테러는 테러다’가 이 글이 정작 말하려는 것을 잘 압축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은 흥미로운 글이다. 무슬림을 배제한 결과로 거칠게 말하면 ‘테러범을 양육’하고만 프랑스 사회 내부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 문제점은 테러 이전과 이후의 프랑스를 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하나의 거친 예를 들어보자. 한국의 동남아 이주노동자 가정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한국인 아이들에게 차별 당하면서 자랐고, 커서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못했다. 아이는 청년이 되었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고, 어떤 것으로도 인정받거나 주목받아본 경험이 없다. 그런데 인터넷 혹은 지역(주로 소외된 계층이 사는 지역이다) 커뮤니티를 통해 나를 인정해주고, 내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해주는 동남아 자국 출신 종교인들을 발견했다. 청년은 그들의 ‘신념’을 충족한다는 명목으로, 평소 그 동남아 자국 출신 종교나 다른 모든 권위를 '골고루' 비판하던 한국의 언론사를 찾아가 언론인을 살해하는 테러를 벌였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래도 생각해보자. 여기서 우리가 지켜봐야할 지점과 거론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그 동남아 종교의 미개성’인가, 아니면 ‘테러는 범죄다’라는 목소리인가, 아니면 ‘서울은 세계의 수도다’라는 수사인가, 아니면 ‘나는 그 (한국의 언론사)다’와 같은 호소인가.

여기서 우리가 말해야할 것은 ‘테러는 다시 발생하면 안 된다’는 목소리와 함께 이 테러를 낳은 한국 사회의 모순적 구조 아닐까. 왜 한국 사회는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이주노동자 아이들을 방치해서 이런 테러까지 배태했느냐에 대해서 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어 외적으로는 한류만 부르짖는, 동남아를 문화적 경제적 착취의 대상으로만 볼뿐 공존의 대상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대아시아 문화 경제 정책들을 따져물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따져보면 똑같은 일이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왜 그 동남아 국가를 욕하거나 종교를 욕하거나 '지금은 그저 테러를 비판하며 피해자를 추모할 때다’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나는 이런 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테러 직후부터 이어진 표현의 자유가 포함된 세속주의 vs 종교 중심주의 논쟁 역시 이런 점에서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가 한국에 보도된 이후 이주민에 대한 편견은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만나고, 사건에 대한 충격과 결합되어 더 빠르게 타오르고 있다. 이제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이슬람은 원래부터 폭력적인 종교이며,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종교라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표현의 자유 수호와 테러에 대한 비판, 그 이상을 보기 위하여)처럼 테러 직후 ‘미개한 이슬람’ 비판이 나오면서 처음의 논쟁 구도가 약간 틀어졌지만, 세속주의를 바탕으로 이슬람을 ‘교화’하려 했던 서방의 시도들이 어떻게 실패했고, 그런 실패가 어떻게 IS를 배태했느냐는 관점의 논의는 이 지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건 프랑스 사회 외부의 유럽 전체적 관점에서의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외부적 구조의 관점과 앞에서 얘기했던 내부의 구조적 관점은 종국에 다시 만난다. 샤를레 엡도가 인종주의적 편견을 담은 만평을 실었다는 것은, 그것이 일부라고 해도 분명해 보인다. ‘그것 때문에 테러를 당했다’는 말이 아니라, 피해자의 지위와 피해자 이전의 지위, 특히 피해자 이전의 지위가 프랑스 사회의 세속주의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었다면 이에 대한 지적은 테러에 대한 거부와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샤를리 엡도만을 향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그런 상황을 배태한 프랑스 사회를 향해야 한다는 점, 나아가 프랑스가 속한 서방 세계 주류 국가들에게까지 화살이 닿아야 한다는 점을 잊지말아야 한다.

그런 이유는 <뉴욕 타임스>와 <르몽드> 등을 인용해 “지금 프랑스는 9·11 테러 뒤 감시를 강화했던 미국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한겨레>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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