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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떤 통치에 대한 우화다.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임모탄 조가 세운 국가 시타델은 모든 구성원을 각자의 자리에 걸맞은 생산 영역에 동원하고 배치하는 ‘효율적’ 체제다. 외모와 몸매가 수려한 여성은 지배 권력의 인적 자원을 재생산하는 자리에, 그렇지 않은 여성은 구성원들의 먹거리인 ‘어머니의 우유’를 생산하는 위치에 분리해서 배치했다. 어린 워보이들은 시타델의 권위적 운영 체제(도르래)를 굴리는 단순 노동을 시키고, 성장한 워보이들은 체제 수호의 자원으로 동원한다. 군중도 워보이들의 지시에 따라 땅을 경작하거나 광물을 판다. 그들은 적절한 생산 벨트에 배치돼 체제를 유지하는 핵심 자원들이다.

하지만 정작 생산의 터전인 땅, 생산의 핵심 동력인 물, 기름과 가스 같은 에너지, 이 터전과 동력을 관리하는 무기는 모조리 임모탄 지배 권력이 독점하고 있다. 생산하는 자와 소유하는 자는 이렇게 철저하게 구분되어 생산하는 자를 소유에서 소외시킨다. 소유의 독점은 소수의 풍요와 다수의 고통을 야기한다. 다수가 고통을 겪는 부조리 속에서도 이 체제가 다수의 힘에 의해 전복되지 않고 유지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수가 고통의 책임을 지배 권력이 아니라 자신이나 자신과 같은 주변의 피착취인들에게 전가하도록 만드는 어떤 기만의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만의 요소는 세 가지. 하나는 워보이들을 통치하는 종교적 구원이다. 워보이들은 임모탄 지배 체제가 자신들을 착취하고 있음에도 이 체제를 수호하는 데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이로써 현세에서 ‘기억되는’ 존재가 되는 동시에 내세인 ‘발할라의 문(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전사의 천국)’에서 구원되기를 갈망한다.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이 종교의 세계에서 ‘기억되기’와 ‘구원되기’를 갈망하는 모습을 우리는 현실에서 충분히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두 번째 기만의 요소는 간헐적으로 은혜롭게 수여되는 보상 시스템이다. 군중은 지배 체제가 가끔 하사하는 ‘트리클 다운’-임모탄이 물을 내리는 장면은 단순한 스펙타클이 아니다-의 수혜를 입기 위해 서로 치받으며 경쟁한다. 그러면서 ‘은혜를 내리는 존재’로서 임모탄을 숭배하고 추앙한다. 부를 독점하고 있음에도 간헐적인 기부 등과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도덕성마저 추인받기를 원하고, 이에 순응하는 지배 계급과 피착취자들을 우리는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가부장적 통치다. 임모탄의 여인들은 수려한 외모를 경쟁력 삼아 임모탄의 아내로 간택됐다. 남성 권력이 중심인 지배 체제에서 여성은 외모라는 ‘유전적 자원’으로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만 지배 계급의 인적 자원 재생산에 동원되는 착취 구조와 마주한다. 이 착취 구조는 물리적인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는다. 이 구조에 순응하는 여성들에겐 지배 체제의 종속품이 되어 착취의 대가를 공유하며 상대적으로 평탄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간택된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가부장적 통치에서 탈주해 ‘어머니들의 녹색의 땅’을 찾아가던 임모탄의 아내 치도 프레자일의 모습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치도는 트럭에서 떨어진 스플렌디드를 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차를 전복시킨 임모탄을 보고 “그는 우리를 아껴주고 있어”라고 소리치며 임모탄에게 돌아가려 한다. 임모탄은 지배를 위해 체제를 굴리지만, 잔혹함의 폭력을 명징하게 드러내며 공포로 통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가부장제는 체제의 종속품이 되어 체제의 논리를 재현하는 여성에게 기꺼이 체제의 일원이라는 지위를 수여하고 우대한다.

이 통치 구조는 종교적 구원과 간헐적 보상 시스템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착취하고 있는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정작 주변의 피착취자들과 경쟁하며 체제에 순응하는 자들에게 체제는 체제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소속감과 수혜적 보상 시스템을 제공한다. 소속감과 수혜적 보상은 피착취자들을 안주하게 한다. 이 구조에 종속된 이들은 체제의 이탈자들이 발생했을 때 재빨리 그들을 타자화하면서 자신들은 그 체제의 ’정상적’ 일원임을 재확인받으며 안도한다. 정상성 이데올로기와 통치는 이렇게 만난다.

종교적 구원과 간헐적 보상 시스템, 가부장적 통치라는 이 세 가지 기만 요소로 이뤄진 체제는 지배 체제의 독점을 은폐하고 하위 주체들이 서로 견제하거나 경쟁하면서 스스로의 통치를 구현해가게 하는 핵심 장치다. 현대 자본주의 권력은 이렇게 긍정과 생산의 힘으로 사람들이 스스로의 통치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한다. 모두가 병들었지만 아파하지 않는 체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물건이 아니야. 소유물이 아니라고!”라는 스플렌디드의 외침은 상징적이다. 퓨리오사와 함께 체제에서 탈주해 ‘어머니들의 녹색의 땅’이라는 유토피아를 향해 찾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통치 체제 외부에서 새롭게 거듭나겠다는 주체화의 재현이다. 조지 밀러 감독은 그 주체화의 가능성을 ‘종교적 구원’에 종속된 워보이나 ‘간헐적 보상시스템’에 구속된 군중보다 ‘가부장제에 의해 간택됐던’ 여성들에게서 찾았다.

하지만 ‘어머니들의 녹색의 땅’이라는 유토피아는 없었다. 퓨리오사는 절규한다. 이때 맥스가 말을 건네고, 퓨리오사와 5명의 여인, 부발리니의 여전사들은 맥스와 함께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체제를 전복하기로 결심한다. 이 모습은 무엇일까. ‘가부장적 통치’에서의 해방은 반쪽짜리 해방이다. 해방은 체제가 곳곳에 심어놓은 기만의 장치들을 함께 전복할 때 비로소 올 수 있다. 여성들이 기폭제를 놓은 해방의 서사를 워보이들과 군중이 단순히 지지하고 서포트하는 역할에 멈춰서면 궁극적인 해방은 오지 않는다. 워보이들과 군중이 예속화에서 벗어나 여성들과 함께 연대하고 직접 행동에 나설 때, 비로소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 열린다. 매드 맥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텍스트였다.


*방송대학보 기고를 보충해서 파벨라에 게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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