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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 스틸컷

딸이 하나고에 다닌다는 학부모가 전화를 걸어왔다. “한겨레 18년 독자인데 구독을 끊었다”고 했다. 입학 전형에서 남학생들의 성적을 올려서 남녀 성비를 고의로 맞춘 의혹을 공익 제보한 하나고 교사에게 학부모들이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는 기사를 쓴 다음날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저 교사가 왜 공익 제보자인지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비리를 처음 제기했고 하나고도 이 사실을 인정했으니 단순 폭로자가 아닌 공익 제보자”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인데 왜 공익 제보자냐”라고 되물었다.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는 관심없다”고 했더니 “이번 일로 내 딸이 힘들어하고 있다. 그러니 나쁜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고 인트라넷 게시판에 올라온 학부모들의 글도 공익 제보 교사에 대한 비난 일색이다. “(성비 조작이) 진실이었어도 지금 공부하는 학생들, 특히 앞으로 입시가 코앞에 있는 고3들, 졸업생들을 생각하면 꼭 그런 방법으로 해결을 보고 싶었을까”라거나 “정의라는 가면을 쓴 위선적 행동들이 모두 우리 아이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반응들이 있었다.

최근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자녀를 둔 40대 학부모들 사이에서 영화 ‘사도’가 인기라고 한다. 2015년 10월6일치 조선일보를 보면, 한 학부모는 “요즘 사춘기라 그런지 부쩍 말을 안 듣는데 이 영화가 스스로 ‘사도세자처럼 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른 학부모는 자녀와 영화를 본 뒤 “처음 생각대로 ‘엄마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사도세자처럼 된다’는 의식을 제대로 심어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사에선 ‘강남’ 학부모라고 대상을 한정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현상은 비단 강남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준익 감독은 “정치에 빠진 멍청함에 대한 반성으로 탈정치를 선택했다”고 말했지만, 일부 관객에게 영화는 가장 정치적인 방법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두 가지 장면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건 노골적으로 표면화하고 있는 소비자 정체성이다. 하나고 학부모에게 학교는 더 이상 교육의 공간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전국에 이름을 떨친 자율형 사립고 하나고의 상징과 서열을 구매해 경쟁의 정글에 서 있는 내 자식에게 갑옷처럼 입혀줄 수 있느냐 여부다. 그러니 학교는 구매의 대상이고, 그 학교는 사회적 공정성 따위가 아니라 구매한 소비자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상품일 뿐이다. 남녀 성비 조작이라는 불공정 과정을 거쳤지만 결과적으로 나와 내 자식은 이 상징과 서열을 구매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과정의 공정함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걱정되는 것은 부정적인 언론 보도로 인해 하나고의 사회적 ‘가격’이 떨어지는 결과다.

자녀와 함께 영화 ‘사도’를 소비하는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영화 ‘사도’는 자식을 교육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필요한 구매 대상이다.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통한 훈육 효과를 상품으로서의 교환 가치로 소비하는 것이다. 만약 학부모들의 구매를 통한 훈육 행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면, 학부모들은 대부분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내 돈 주고 내가 내 아이 교육한다는데 당신들이 왜 난리에요?”

사실 교육과 문화 상품을 소비의 대상으로 보는 정체성의 출현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눈여겨볼 점은 이제 사람들이 이런 소비자 정체성을 인터넷이나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적극적이고도 노골적으로 외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소비자 정체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동적으로 은폐되었다면, 요즘의 소비자 정체성은 공적으로 열린 공간에서 능동적으로 드러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2010년 한국 사회에선 한때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불었다. 이 열풍이 말하는 것은, 반칙하지 않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목소리였다. 진보로 불리는 일부 지식인들도 이 열풍에 편승했다. 문제는 이런 공정함이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거치면서 박근혜 정부는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무위의 통치를 선보였다. 무위의 통치는 모든 책임을 사회 속 개인들을 향해 전가했고, 자력구제와 각자도생을 시대정신으로 만들었다. 남들은 짓밟혀도 나만은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다. 자력구제와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핵심은 소비자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 능력만이 오롯이 나와 내 가족을 생존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소비자 정체성이 노골적이고 능동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어찌 보면 무엇을 해도 지금의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는 데서 나온 체념적 선택의 결과일 지도 모른다. 공적 담론이 무너진 상태에서 무엇을 요구해도 그것이 제도적 호응으로 재현되지 않는 사회. 일방적이면서도 무능한 무위의 통치만 남아 사회같지 않은 사회에 대한 집단적 체념. 최근 눈에 띄게 드러나는 타자에 대한 혐오와 환멸의 정서도 사실은 이런 체념에서 기인한 현상 아닐까.

 

*방송대학보 기고를 보충해서 게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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