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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광고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출처:'지하철1호선'타운홈피

  지하철 1호선을 탔습니다.청량리역에섭니다.1호선을 탄 건 거의 2년만이었습니다.동대문구 이문동에서 마포쪽으로 이사간 게 그 즈음이었거든요.하지만 1호선은 전혀 변하지 않았더군요.팍팍한 삶이 묻어있는,남에게 보여주기위해 멋을 부린 게 아니라,그저 추위를 이겨내기위해 단단히 동여입은 옷차림의 우리네 서민들 모습은 정겹기 그지 없었습니다.

  좌석에 여고생인 듯한 10대 3명이 나란히 앉아있습니다.3명 모두 짧게 쳐올린 커트 머리에 앞머리는 직접 자른 듯한 가지런한 일자 머리를 한 걸 보니 요즘 그들에게 유행하는 머리인 듯 했습니다.개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꺄르르 웃는다는 그들에게 흥밋거리가 생겼습니다.노숙자 행색을 한,6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다가온 겁니다.입가엔 음식 자국이 묻어있고 옷은 한 두어달 빨지 않은 듯 땟국물이 줄줄 흐릅니다.바지는 몇개를 겹쳐 입었는지 왜소한 체격임에도 하체가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듯 보입니다.무릎엔 추위를 막기 위함인지 페인트칠을 해뒀는데,땅바닥에 닳고 닳아 반들반들 했습니다.씻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지,때가 부르트게 만든 손은 가뭄 논바닥처럼 갈라지기 직전이었습니다.하지만 그는 연방 소녀들에게 질문을 퍼부어댔습니다.

  “핵은 누가 만들었지?”,“아인슈타인”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회담은 뭐지?”,“모스크바 3상회담”
  “모스크바 3상회담에 참여한 나라는?”,“미국,영국,소련.”
  “감자엔 녹말이 몇 퍼센트 함유돼있지?,”30%”
  “비행기는 누가 만들었지?”,“라이트 형제”

  쉴새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소녀들은 꺄르르 웃기도 하고,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대충 답을 해 그가 자문자답하길 유도하기도 합니다.그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처럼 질문하고 답하며 점점 더 열을 올립니다.열차 승객들도 흥미로운 듯 백과사전 노인의 질문에 속으로 답을 떠올려보기도 하고,노인의 속사포같은 질문 공세에 대한 소녀들의 반응에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합니다.

  이때 한 소녀가 벌떡 일어납니다.역시 60대로 보이는 흉터가 몇개 그어진 대머리 신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섭니다.신사는 자리에 앉아 백과사전 노인의 자문자답에 끼어듭니다.몇 가지 답을 맞추던 신사가 문득 “혹시 그럼 빵은 어느 나라에서 처음 만든 지 아시오?”라고 묻습니다.그러자 백과사전 노인의 표정이 일순간 바뀝니다.“그런 건 질문도 아니오.빵이 어느 나라에서 만든 게 뭐가 중요하단 건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아마 그 답은 몰랐나봅니다.그러자 대머리 신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소녀들에게 등을 돌려 다시 질문을 시작합니다.“빵이 어느 나라에서 처음 만들었냐니,그게 무슨 질문이야.”라며 연방 다른 질문을 쏟아붓습니다.노인의 모습이 마치 쉽게 삐지는 아이같아 속웃음이 납니다.

  갑자기 반대쪽 연결 통로가 시끌벅적해집니다.많아봐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예수를 믿으시오.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시오.부처는 지옥에 빠진거요.예수를 믿고 노래를 미친 듯이 부르고 박수를 치시오.기도하세요.”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오늘 고향에 내려가 목기를 망치로 다 때려부수세요.목기는 ‘귀신들의 밥그릇’ 입니다.사람들은 죽으면 다 천당과 지옥에 가기 때문에 귀신들의 밥그릇은 필요가 없어요.다 때려부수세요.”

  설 명절을 앞둔 여유 때문일까요.평소라면 일상에 찌들어 그런 ‘소음’이 귀찮기만 했을 승객들은 넉넉한 웃음으로 그 여성의 주장을 받아들여줍니다.그러자 그 여성은 신이 난듯 더 목소리를 높입니다.마침내 성질이 급한 한 남성이 읽던 신문을 확 구기며 “아,거 좀 조용히 해요.그런 설교하려면 집에 가서 아이나 남편 앞에서 해요.왜 여기와서 난리야.”라고 퉁명스레 쏘아붙입니다.그러자 여성은 멋적은 듯 잠시 움찔하다,의자 하나를 지나친 뒤 다시 소리를 지릅니다.승객들은 마냥 재밌습니다.

  이젠 지하철 행상들의 차롑니다.한 40대 여성이 길쭉한 담배 박스를 카트에 담아 그 안에 중국산 무릎 보호대를 한 가득 싣고 중간 통로에 멈춰섭니다.“겨울에 시린 무릎을 보호해주기위한 무릎보호대,2개 1000원입니다.”설이라 부모님께 드릴 보호대를 하나쯤 살 법한데 아무도 호응을 보이지않자 그 여성은 잔뜩 풀이 죽은 채 옆칸으로 옮겨갑니다.

  뒤이어 같은 박스에 이번엔 중국산 칫솔을 가득 담은 40대 여성이 통로를 차지합니다.“칫솔 4개에 2000원,설에 가족들이 함께 쓰세요.”다들 칫솔쯤은 여행 가방에 담아 움직이고 있는 건지,행여 집에 두고 잊고 나온 사람은 없을 지 기대했던 그 여성도 천원짜리 하나 손에 쥐지 못한 채 다음 칸으로 옮겨갑니다.

  시청역을 지나자 이번엔 짙은 선글라스에 막대기를 쥔 맹인이 목에 건 라디오에서 음악을 흘리며 모금 바구니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갑니다.동전 몇개가 바구니에 담기자 어느 방향에서 건넨 건 지 모르겠다는 듯 앞만 보고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합니다.잘은 모르지만,맹인이시라면 청각은 예민해 방향을 잡아볼 법도 한데,솔직히 정말 맹인인지 궁금증이 일기도 합니다.그래도 설 아닌가요.속아서 몇백원 잃으면 어떨까 싶습니다.사실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동전을 던지는 것보다,그런 ‘선행’을 한 뒤에 찾아오는 자기 만족이 더 큰 것 아닌가 싶습니다.그런 기쁨의 대가라면,설사 맹인이 아닌 분에게 속아 동전을 줬다손 치더라도,그 정도의 관용을 베풀 여유가 우리에겐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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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공연되고있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공연 모습입니다. 출처:'지하철1호선'타운홈피

  2년전 쯤일겝니다.김민기씨가 연출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3000회 기념공연을 할 즈음,친구 녀석과 뮤지컬을 보러간 적이 있습니다.옌벤서 온 여성 ‘선녀’가 지하철 1호선에서 실직가장,가출소녀,자해 공갈범,잡상인,사이비 전도사 등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지만,무심하게 지나치기 쉬운 군상들을 만나는 모습을 통해 밑바닥 사회에 대한 풍자와 해학을 그려낸 작품이었습니다.고향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서울역에 내리면서 뮤지컬이 제 머리 속에 박아둔 기억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삶은 늘 팍팍합니다.하지만 사람,인간(人間)은 그 팍팍한 삶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생활에 찌들었을 땐 소음처럼 들렸을 거지만,설 연휴가 주는 푸근한 여유로 그 소음을 ‘군상들의 즐거운 소리’로 바꾼 지하철 1호선 승객들처럼,모두들 연휴동안 푹 쉬시며 여유가 주는 관용을 마음속에 채워보시길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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