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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 두근거림

그저,생긴대로의 당신이 괜찮다

B급 낭인 [이재훈] 2009. 5. 10. 03:23

아이들이 희희덕거린다. 모르는 아이들이 비웃는 건 꾹 참으면 된다. 하지만 매일 집에 같이 가는 ‘영희’가 나를 외면한 채, 반 아이들과 함께 웃는 모습은 견디기 힘들다. 배신감이 든다. 교탁 앞에서 엄마 대신 일일교사로 온 이모가 온갖 천을 덧댄 우스꽝스런 옷을 입고, 남들보다 굵은 특유의 목소리로 내 친구들에게 친한 척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보편적인 모양새의 엄마나 이모를 원할 뿐, 독특함과 특별함, 그리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다들 어리니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보단,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데 급급한 그저 아이들일 뿐이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과, 아니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과 다르다손 싶으면, 집단에 기댄 채 그 다른 존재를 비웃고 본다. 그래야 집단의 안정감 속에서 사회성을 올.바.르.게 배우고 있다고 칭찬받을 테니까. 아, 나도 아이니까 단지 함께 그러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아빠 없는 아이다. 그것마저 나는 내 주변 친구들과 다른, 특.수.한 아이인 게다.(멋대로 재구성한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中 명은의 독백)




사회관계 배우기는 보편성 교육에서부터 시작한다. 튀는 아이보단, 다른 ‘착한’ 아이들처럼 말썽피우지 않는 아이가 되기를 학교와 부모는 바란다. 계단에선 왼쪽으로 걸어야하고, 횡단보도에선 손을 들어야 제대로 배웠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이런 규범에 복종하게 만드는 보편성 교육의 맹점은 바로 교육받는 이들이 스스로 자체 ‘규범’을 만들어 구성원들에게 획일화된 기준을 들이댄다는 데 있다. 비오는 날 하굣길에 우산 든 엄마가 기다리고 있어야하고, 도시락엔 국물과 함께 반찬 세 가지가 꼬박 들어있어야 보편적인 아이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와 다른’ 아이로 낙인 찍혀 매도당한다. 엄마나 아빠 둘 중에 한 명이 없거나, 둘 다 없으면 낙인은 살갗 속 깊이 아로새겨진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결핍, 그리고 그 결핍을 극복해내는 방법이 서로 다른 자매가 결국에는 갈등을 딛고 화해하는 가족 얘기를 담고 있다. 오명주(공효진)와 박명은(신민아)은 아버지가 다른 자매다. 둘은 거리를 두고 살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만나게 되고 명은의 아버지를 찾아 함께 길로 나선다. 명주는 사회적 편견을 개의치 않는다. ‘애비 없는 년이 또 애비 없는 딸’을 키운다고 주변에서 아무리 혀를 차도 “부모 잘못 만난 죄? 그런 거 없어, 그냥 사는 거야”라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비루하다고 여기는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즐길 줄까지 안다. 하지만 명은은 다르다. ‘애비’의 결핍, 그리고 같은 결핍을 겪지 않은 많은 아이들이 내뱉는 사회적 편견의 잔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가족을 거부한다. 그리고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사회적 지위와 그 지위를 인정해줄 수 있는 집단인 이른바 명문대와 대기업이라는 보편적 집단에 편입된다.

이 경우 보편적인 영화라면, 사회적 편견을 개인이 극복하기는 힘들다는 전제 아래 현실에 굴복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다. 좀 더 독특함을 갖춘 영화라면 ‘비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거부한 명은의 선택이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미칠 지에 대해 집중 조명하는 수준 정도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가 내세우는 화해의 목소리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가족의 결핍, 그리고 그 결핍을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조롱하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찬란한 반기가 그 화해의 코드다. ‘비정상적인’ 가족을 ‘결핍’이라고 내려다보는 주변의 시각에 코웃음을 친다. 그리고 영화가 내세우는 대안적 가족의 결과물은! 이는 ‘식스센스 이후의 최고의 반전’이라니, 영화관에서 확인하도록 놔두는 게 예의일 듯싶다.


나름 소신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내세우는 개인이라도 자기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안정된 삶을 물리치고 척박한 현실에 부대끼며 보편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손뼉 치며 응원하기는 사실 힘들다. 하지만 보편적이지 않은 삶이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인식은, 그 자체가 이미 획일적인 삶을 강요하는 사회 보편적 인식의 재생산에 다름 아니다. 이 재생산 구조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내고픈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먼저 물어봐야할 것 같다. 나는 과연 남들의 비웃음이 쏟아지는 척박한 길을 가슴 펴고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가, 라고. 특수한 개인이 아무리 용기를 내더라도, 보편성 교육이 가지는 사회 운영의 효율성을 담보로 한 집단의 폭력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오롯이 자기 길부터 닦아나가는 온전한 개인이 하나 둘 늘어야 집단의 균열 조짐이 보일 수 있는 것 아닐까. 촌스런 옷을 입고 시장 바닥에서 냄새나는 생선을 팔면서도 사과 한 조각 베어 물고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고, 명은에게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도 그녀가 보편적이지 않은 가족의 형태를 차근차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끈질기게 옆을 지켜주는 명주가, 그래서 단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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