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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수컷의 관계맺음은 지배 혹은 굴종의 아비투스로 점철된다. 원시의 정글에서 수컷은 먹이 사냥에 더해 다른 수컷으로부터 사냥한 먹이를 빼앗거나 지킬 궁리도 해야 했다. 이때 수컷은 먼저 온전히 근육의 부딪힘으로 우위를 겨룬다. 힘이 센 수컷은 당연히 약자의 사냥감을 빼앗지만, 그렇다고 모두 빼앗진 않는다. 약자가 굶어 죽으면 결국 강자가 누릴 사냥감의 절대량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틈을 이용해 약자인 수컷은 나름의 처절한 생존법을 배운다. 강자에게 “받들어총!”으로 굴종하면, 승산이 없는 힘겨루기를 했을 때보다 더 많은 비율의 먹이를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수컷들은 생태계의 먹이사슬 마냥 지배 또는 굴종했다. 현대의 수컷들도 진화하지 않았다. 게다가 근대의 가부장적 위계질서라는 프레임까지 물려받았다. 수컷들은 동년배 친구 사이에도 엄연히 관계의 상하를 구분한다. 관계를 주도하는 수컷은 그 지배 관계에 별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 수컷하고만 친분을 유지한다. 힘이 비슷한 수컷끼리는 친해질 수 없다. 내 앞에 꿇을 놈이냐, 나와 맞장 뜰 놈이냐, 나보다 센 놈이냐가 있을 뿐이다. 수컷들의 지배 욕구는 관계맺음의 외연이 확장되는 만큼이나 끊임없이 충돌한다.



홍상수는 이런 수컷들의 습속에 날선 매스를 들이대 왔다. 늘 비슷한 얘기를 꺼내지만, 늘 새롭다. 하지만 내 안의 천박한 동물적 욕망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봐야 하는 불편함이 버거웠다. 아무리 속내를 다 드러내는 친구라 해도 어디엔가는 꽁꽁 숨겨둘 수밖에 없는 비루한 속.물.근.성.을 통렬하게 까발리는 홍상수는 내게 팬티까지 발가벗고 운동장을 뛰라고 지시했던 대학 동아리 선배 같은 존재였다. 결국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헌준(김태우)이 선화(성현아)의 몸을 손수 씻겨주고 “내가 섹.스.해.서. 깨.끗.하.게. 되는 거야”라고 내뱉는 장면을 본 뒤 뜨악하고 홍상수와 잠시 ‘의절’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그런가, 다른 게 보인다”며 밑바닥에서 한발 올라선 홍상수의 변화에 발맞춰 나도 불편함이 단지 불편하다는 그 이유 때문에라도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를 알게 됐다. 수컷들의 비루한 습속을 불편하게 바라보면서 도대체 욕망을 추구하는 남녀 간의 권력관계가 어떻게 사랑이라는 사회적 메타포로 포장되는지 아슬아슬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영화가 아니라, 그 사회적 메타포가 불편해지고 그 메타포의 배후에 서 있는 사회적 지배 이데올로기가 불편해지기에까지 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도 여러 마리의 수컷들이 등장한다. 영화는 구경남(김태우)이 구경하는 대상으로서 자기 안과 밖의 속물적 수컷 본능을 나열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외부의 수컷들을 통해선 지식권력의 추악한 가면을 고발한다. 고 국장(유준상)은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 뜬금없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하극상이랑 예의 없는 것들이야. 나한테 엉까지마! 알았어?”라고 일갈한다. 위계를 애써 확인하지 않으면 언제 거세될지 모른다는 지독한 공포의 역설적 표현이다. “어떤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할까요?”라는 철학적 물음을 통해 경남의 지식권력에 굴종하는 자세를 보이다 느닷없이 팔씨름을 제의하며 힘으로 경남에게 ‘엉까보려’하는 제주의 남학생도 가식의 가면을 쓴 외부의 수컷 중 하나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이는 아내 고순(고현정)이 언제 자기감정 움직이는 대로 떠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한편, 자신의 지식권력에 호기심과 존경심을 보이며 굴종하는 여학생은 겁탈하며 상하 관계가 전복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화가 양천수(문창길)도 그런 군상이다.

경남 내부에서 발현되는 수컷 본능 역시 지배 관계를 통해 남녀 관계를 바라보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똥침에 다름 아니다. 경남은 이상형인 고순을 갖기 위해 먼저 자신보다 지식 권력 위계에서 상위에 있는 고순의 남편 양천수와 맞장 뜬다. 특강 뒤풀이 자리에서 3명의 젊은 남학생을 이겨본 알량한 자신감으로 양천수에게 팔씨름을 제의한다. 하지만 이미 공고해져있는 자신의 지배적 위계를 괜한 힘겨루기로 손상시킬 이유가 없는 양천수가 이를 거절하자, 이번에는 고순과의 성관계는 어떠냐는 날선 질문으로 늙은 양천수의 기를 죽이려 한다. 수컷들의 힘.센.척.하는 과시욕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순간, 고순은 이 참을 수 없는 유.치.함.에 버럭 화를 낸다.

 


경남은 물러서지 않는다. 욕망의 평등한 교환을 통해 얻게 되는 감정의 충족이란 관계 맺음을 경험한 적 없는 수컷은 늘 이렇게 일방통행이다. 수컷에게 내가 지배하지 못한 여자는 ‘점령하지 못한 고지이자 미지의 판타지’로 남는다. 이때 수컷은 끊임없이 직진, 또 직진한다. 점령으로 환상을 충족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현실로 돌아와 “이 여자, 정말 가져도 되나”라며 고민에 빠지는 게 수컷의 습속이다. ‘일단은 욕망 우선, 이성은 갖고 난 뒤’에 따져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경남은 수컷에게나 통할 관계 우위 점유 시도의 표적을 이번엔 고순에게 겨눈다. 끊임없이 “당신은 내 짝이야”라며 둘의 만남에 대해 과도한 운명론적 암시를 부여한다. “그렇게 살지 말아요. 나중에 외로워져요”라며 고순의 삶에 대해 어설프게 재단해보려는 시도도 해본다. 아.는.척.하며 어설픈 지식의 우위로 상대를 제압해보려는 지배 욕망의 발현에 고순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란 촌.철.살.인.으로 수컷을 바짝 오그라들게 만든다. 이제야 경남은 순순히 물러난다. 수컷에게 지배가 불가능한 대상은, 굴종 혹은 외면이 해결책이다.

결국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통해 홍상수 영화는 속물들의 도덕 교과서 혹은 도덕적 억압기제에 종속된 인간들의 관음적 엿보기 수단으로 기능한다. 속물들은 영화라는 대중 매체로 가감 없이 소개되는 자기 안의 천박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2시간 동안 뜨끔해한 뒤 영화관을 나와 현실의 자신에 대한 일단의 제어를 시도한다. 반면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구현된 제도의 억압에 충실히 따르며 속물적 근성을 외부에 내보이길 망설여온 개인에겐 겪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은근한 대리 만족으로 해방감을 맛보게 한다. 자기 아내와 ‘놀아먹은 놈’에 대해 “자네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같은 사람끼리” 라고 말하는 양천수의 한마디는, 수컷 속물 본성을 잉태시킨 집단과 사회체계는 날카롭게 해부해도 거기 종속된 개인만은 미워할 수 없다는 홍상수의 목소리 아닐까. 그렇게 홍상수는 거미줄에 얽힌 우리에게 마취용 아편을 주사한다.

*이 글은 미디어스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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