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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진정성을 가질 때 언어는 한없이 무거워진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매일 아침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왼손은 턱에 괴고 오른손은 클릭질하는 자세로 심드렁하게 창을 연다. 정치뉴스엔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고 곧 신경줄을 놓는다. 대체로 분노할 힘도 없이 썩소만 짓게 되기 때문이다. 경제뉴스에선 잘 알지도 못하는 숫자 놀음에 수십조 원이 요동친다. 클릭하면 그저 스스로가 얼마나 비경제적인, 그래서 2009년 대한민국 사회에선 얼마나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동물로 규정되는지 확인하는 거울 같아 슬쩍 외면한다. 물론 냉소와 외면만 있는 건 아니다. 각종 연예 뉴스에 검지가 빠르게 경련하기도 한다. 이런 뉴스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들의 클릭질을 ‘낚기만’ 원할 뿐이야, 혹은 ‘…’로 끝맺는 제목을 남발하며 말초적인 궁금증을 유발하는 거야, 라는 사실은 다.안.다. 하지만 클릭한다. 1 칼로리도 채 들 것 같지 않은 손가락질이라는 경제적 기회비용에, 내 안의 말초적 욕망과 관음증적 호기심이 금방 해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지 찝찝하다. 연예 뉴스의 언어는 갈수록 가벼워진다. 웃기지도 않으면서, 그저, 가볍기만 하다. 차라리 웃기기라도 하던지. 그럼 그 가벼움에 가려진 해학이라도 찾아볼 텐데. 이 언어들의 가벼움은 그저, 비루한 자음 모음의 조합에 다름 아니다, 싶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유혹에 압도당한다. 곧 압도당한 내 자신을 또 다른 내가 한없이 초라하게 응시한다. 왜일까. 나는 그저 욕망에 충실했을 뿐인데, 그 욕망 추구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는데, 왜 그 선택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야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아마 욕망의 마스터베이션으로 스스로를 달래고 있는 나에 대한 아니꼬움에 있었다. 홀로 존재하는 개인에겐,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충족될 욕망은 실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결국 홀로 존재하지 못할 우리에겐, 욕망을 충족시켜줄 타자와의 관계, 그 관계의 성숙한 형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할 의무라는 게 있다. 하지만 말초적 뉴스만 클릭한 나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한 상호교류적인 욕망 추구에 쏟을 노력을 애써 외면한 채, 최소한의 기회비용으로 내 안의 속물근성만 마스터베이션한 셈이다. 내 스스로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 욕망이 발생하게 된 근원적 프레임인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구현해보려는 노력과 그때 들여야 할 일단의 기회비용은 치르려 하지 않고, 관계로 인해 받게 될 부정적 상처만 걱정하며 그저 도피부터 하고보는, 그런 방어기제에만 충실했기 때문인 것도 같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여고괴담5:동반자살>은 보는 내낸 뉴스를 클릭하는 자세를 만들어줬다. 한 여고생은, 소중하게 아끼던 친구가 임신한 뒤 '오빠'에게 차였다는 이유로 자살하려하자, "너와 함께 죽을 수 있어서 행복해."라며 동반자살하겠다고 나선다. 다른 여학생은 임신한 여학생에게 '오빠'를 빼앗기고, 그때문에 성적도 떨어졌다며 동반자살을 가장한 살인을 저지른다. 이 살인음모 여학생의 부하 격인 또다른 여학생은 아버지에게 당하는 상습 폭행을 이유로 죽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폭행하는 이유를,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살인음모 여학생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한 흔적이 없다. 임신한 여학생이 왜 다른 친구들과 동반자살이란 수단을 택하게 됐는지, 여고생 신분인 채 임신한 '일탈'로 인해 사회적 타살 요소는 얼마나 깊숙이 개입됐는지에 대해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임신한 여학생을 따라죽으려는 친구 역시, 왜 그렇게 우정에 집착하게 됐는지 알 수없다. 내내 난무하는 건, 치정 살인극을 공포영화 내러티브로 풀어가려한 억지와 반복되는 날선 비명소리 뿐이었다.


그저 연예뉴스 클릭질처럼 쉽게 넘어가려했다. 하지만 자꾸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한 말이 들려왔다. 여학생들은 입버릇처럼 “나 자살할거야.”란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그저, 가볍게 겉돈다. 실제 자살하는 사람은, 유서에서나 일상에서나 ‘자살’이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입에 담지 않는다. 그저 “죽고 싶어.” 정도라면 모를까. ‘죽고 싶어.’와는 달리 ‘자살’이란 말은 철저히 타자의 언어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생전에 “죽고 싶어.”라고 내뱉는 말은, 무기력한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마무리 지어 줬으면, 하는 허탈하고도 비현실적인 바람의 다른 표현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개인은 삶의 수많은 과정 속에 담긴 복합적 이유들로 인해 생기게 된 극단적 자기혐오를 넘어,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픈 수동적 죽음 욕구를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할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스스로가 자신을 죽인다는 생각보단, 주변인과 조직과 제도와 집단이라는 타자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대응하지 못한, 무기력한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뜬다. 스스로를 ‘살(殺)’하겠다는 살벌한 언어를 스스로의 입에 담을 만큼 그들은 스스로에게 폭력적이지 못하다. 다만 그들이 숨진 뒤, 집단은 그들이 ‘자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만 얘기하고, 관계를 절단한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끊임없이 가벼운 언어로,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에 이르게 되는 지난하고도 수많은 이유들을, 그저 공허한 행위로 규정지었다.

관계가 진정성을 가질 때 언어는 한없이 무거워진다. 절실한 연애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추상적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는 수많은 감정을 켜켜이 응축한 채 진심을 전달하려 발버둥 친다. 저예산 영화 <워낭소리>의 노인이 내뱉는 한 마디 말에 응축된 삶의 무게는, 수백억 원을 쏟아 부은 블록버스터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연예 뉴스의 언어는 뉴스의 전달 가치 여부는 논외로 두고, ‘낚시’에 의한 클릭 숫자에 비례하는 광고 액에만 목을 맨다. 부족한 내러티브를 그저 몇몇 무서운 장면 설정과 날선 비명소리로 가면 씌워 이해를 강요하는 시도, 시리즈의 지속성을 원한다는, 그들의 눈에만 보일법한 이름 없는 관객의 기대에 부응했다는 제작 논리 역시 자본에 종속된 영화로서의 철학 부재만 드러냈다. 이들에게 뉴스 소비자 혹은 영화 관람객과의 소통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보려는 진정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본만 뒤에서 웃음 지을 뿐이다. 자본은 마스터베이션만 하는, 관계에 미숙한 파편적 개인을 생산해도 생존에 별다른 지장이 없다. 자본의 재생산에 진정성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익 혹은 손해의 단순논리만 존재할 뿐. 자본이 마스터베이션의 부끄러움을 알게 될 만큼 성숙할 때는 과연 언제일까, 아니 그때가 오긴 할까. 날선 비명과 긁히는 소리에 피곤한 귀를 후비고 극장을 나서면서, 문득 그게 궁금했다.


*이 글은 미디어스에 실렸습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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