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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인앤아웃 no.10

길로 폰테코르보 감독의 영화 <알제리 전투>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쟁을 그리고 있다. 네이팜탄 폭격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이던 친인척을 잃어야했고 자기 삶의 터전에서 프랑스인들에게 "더러운 아랍놈"이란 말을 듣고 살아야했던 알제리인들은, 시대의 야만과 무너진 자존감에 대한 분노를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에 대한 지지로 해소한다.

FNL은 저항의 첫 수단으로 테러를 선택한다. 이에 프랑스는 1957년 공수부대를 투입해 알제리인 거주지역을 게토로 만들고 무차별로 거주민을 검거한 뒤 고문이란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해 FNL 조직을 붕괴시킨다. 그러나 민중은 사라진 FNL의 저항정신을 잊지 않았다. 3년 뒤의 민중 봉기와 그에 따른 2년 뒤의 독립 쟁취는 그 저항정신의 바탕 위에서 가능했다.

26일로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은 안중근 의사에 대해 최근 일부 일본학자들이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해 논란이 뜨겁다. '테러'라는 단어의 폭력적 함의가 안 의사에 대한 평소 생각과 쉽게 연결되지 않아 잠시 움찔했다. 9·11 테러 이후 이 단어는 우리에게 어느덧 '과격한 무차별 폭력과 살육'이란 선정적 색깔만 덧칠해져 있지 않은가.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는 국제관계, 혹은 온갖 민족적·종교적·정치적 함의가 얽히고 설켜 간단히 규정하기 어렵다. 다만 '정치적 목적이 있고, 폭력이 수반되며, 조직적인 사전준비가 있고, 심리적 충격과 공포심을 일으키는 행위'가 개념화의 최소공배수적인 구성요소로 여겨진다. 여기에 충실한다면, 사실 안 의사도 테러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식민 지배 항거라는 정치적 목적을 두고 총기살인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 사전모의를 거친 뒤 일본 제국주의에 심리적 충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다시 '알제리 전투'로 돌아가 프랑스 공수부대의 FNL 붕괴 시도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은신하던 FNL 지도자 벤 아민은 동지 알리에게 "우리가 언제까지 테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라고 묻는다.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이라고 분연히 답한 알리에게 아민은 고개를 저으며 "테러는 하나의 수단일 뿐, 궁극적인 혁명은 민중이 일으키는 것이네"라고 말한다.

역시 FNL에서 투쟁했던 작가 프란츠 파농은 저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서 '굶주리는 농민은 계급 체계의 외부에 있으며, 폭력만이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피착취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깨달은 계층이다. 그들에게 타협이란 없고 어떠한 협상도 불가능하다. 식민화와 탈식민화는 단지 상대적 힘의 문제일 따름이다. 피착취자는 해방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폭력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라고 썼다.

이런 담론을 보면서, 안 의사가 '테러리스트냐 아니냐'는 개념 논의보다 안 의사의 ‘폭력’적 행위에 숨어있는 의지와 함의를 살펴보는 것이 본질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농과 아민의 견해에 따른다면, 안 의사의 '테러'는 민족해방을 향해 나가는 단계적 의미에서의 수단적 폭력으로 볼 수 있다. 10년 뒤 분연히 일어선 3·1 운동이란 비폭력적 민중 봉기는, 식민 제국주의의 착취와 그에 대항하던 피착취자의 폭력적 저항이라는 수단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폭발할 수 있었다. 위협적이지 않은 포즈로 비폭력 평화를 외치라는 일말의 강요는, 강자가 원하는 혹은 약자의 자리에서 그들의 절실함을 느껴보지 못한 객체들이 말하는 '약자가 사랑받는 법'의 동원기제에 불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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