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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인앤아웃 no.11

▲ '미디어법 등 관련 권한쟁의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 공개변론ⓒ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는 질곡이었다. 좌와 우의 대립은 동등한 지위에서 충돌한 적이 없다. 우는 주로 권력을 잡았고, 좌는 그 권력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기능했다. 이론과 사유를 바탕으로 한 신념이 정반합을 거치며 발전하는 과정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간은 누구나 사유를 바탕으로 개별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명제는 통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은 자에게 굴종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폭력적 관계 기제만 작동했다.

분단의 비극과 이를 활용한 국가 권력에 의해 말 한마디 ‘잘못’했다 어디론가 끌려가거나 혹은 밥그릇을 뺏기는 이곳에서 정치적 신념에 충실한 선택과 소신은 표현되기 어려웠다. 그리고 문득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적 선택’이란 개념은 사유나 신념에 근거한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부정적 수사로 통용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달 29일 미디어법 권한쟁의심판에서 "법안 심의·표결 과정은 잘못됐지만 법안은 유효하다"고 결정했다. 방송법 표결 과정에서 일사부재의 원칙이 위배됐음을 인정한 재판관이 5명으로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법이 결국 ‘무효’라는 결정을 내린 재판관은 3명이었다. 3명의 재판관이 "절차의 권한 침해를 인정하면서 시정 문제를 국회 자율에 맡기는 건 헌재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소수 의견으로 묻혔다. 헌재는 왜 이런 모호한 선택을 했을까.

헌재는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개헌된 헌법에 따라 이듬해 구성됐다. 역사가 21년 밖에 되지 않았다.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장이 각 3명의 재판관을 선임해 모두 9명으로 구성된다. 재판관 임기는 6년이다. 정권의 주기보다 임기가 긴 데다, 1~2기 때의 재판관 이후 연임이 없었던 관례상 이들의 선택이 개별적인 밥그릇 지키기라고 보는 건 논리적 비약으로 볼 수 있다.

정작 문제는 이번 정권에서 불붙은 개헌 논의에 따른 헌재와 대법원의 파워게임에 있는 것 같다. 대법원은 최근 개헌으로 헌재를 대법원에 통합하려는 의견을 국회 헌법자문위원회에 냈다. 최상급 사법 기관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온 대법원으로선 최근 헌재의 권력화가 탐탁지 않다. 애초 헌법 해석 정도의 역할을 하리라 생각했던 헌재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관련 결정, 2006년 사립학교법 관련 결정 등 굵직한 정치적 사안을 맡으며 대법원의 위상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헌재는 존치를 주장하며 이에 맞서고 있다. 되레 재판관 9명 모두를 국회가 선임하거나 최소 대법원장의 재판관 선임권이라도 국회로 이양하길 바라는 견해를 국회에 냈다. 최상급 사법 권력을 둔 두 기관의 지위 충돌에서 사실 대법원은 개헌되지 않아도 크게 잃을 게 없지만, 헌재는 존재 자체가 상실될 수 있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개헌을 논의하는 곳이 국회인데다, 적어도 2012년 총선까진 현재의 집권 여당이 주도권을 쥐게 된다.

헌재가 차라리 떳떳하게 "절차도 문제없고 법도 유효하다"고 결론지었다면, 이는 법적 혹은 정치적 신념의 일관성 문제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고 한 볼테르의 말처럼, 그들의 신념을 존중하고 법적 정치적 논리로 토론할 수 있다. 그러나 개헌을 앞두고 속해있는 기관의 존재 상실과 그에 따른 권력과 명예의 폭락을 불안해하는 그들의 '정치적 선택'이라면, 한국 현대사의 질곡만큼이나 바라보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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