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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인앤아웃 no.15

출장 차 간 타이베이의 ‘명동’ 시먼띵은 젊은이들로 북적댔다. 같은 아시아계 인종이니 별다른 존재감이 없겠지 싶었는데, 힐끔힐끔 쳐다보는 그들의 눈길에선 이질감을 느낀 표정이 묻어났다. 비슷한 옷매무새와 머리 모양을 공유하는 집단에 속해있는 그들에게 한국에선 평범할 법한 차림새가 생소한 느낌을 줄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집단에서 개별적으로 분리된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만의 문화적 준거집단에서 이탈된 나에 대한 자각은 고립감도 줬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란 개인의 존재감을 공고히 확인하는 계기도 만들어줬다.

“제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전 키가 176밖에 안 되는 루저라… 사실 저희 반에도 180 넘는 애가 둘 뿐이기 때문이에요.” 이 공간에 쓴 ‘루저녀를 루저로 만드는 사회’란 글에 대한 반박 중 하나다. 학생이라고 밝힌 그와 오갔던 여러 차례의 토론에서 나름의 ‘합리’로 무장한 그의 논리에 반박하느라 진땀을 흘려야했지만, 유독 저 부분만은 뭐라 답해야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타이완에서의 사유에 비춰, “왜 주변 집단에 견줘 일반화한 기준에 맞추지 못하면 그렇게 불안함을 느껴야하나요”란 직설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으로 규정한 ‘지위’란 개념에 주목했다. 드 보통은 우리가 불안과 울화를 느끼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속해있는 준거집단의 조건, 즉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했을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꼽았다. 그는 (공교롭게도) 키를 예로 들어, 키가 작은 사람이라 해도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 살면 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지만, 이 집단의 다른 사람의 키가 조금이라도 더 자라면 갑자기 불안에 빠지고 불만족과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자신의 키가 단 1㎜도 줄어든 것이 아닌 데도 말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다수의 의견에 적응하고 타협하며 조율하는 과정이 ‘민주적’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가끔은 다수의 의견-때론 집단 전체의 의견으로 표변하기도 하는-에 ‘거리두기’를 해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다수에게 받아들여지는 기준이나 관념은 때론 이성적인 직관으로 많은 이들의 생각을 관통하는 진리가 될 때도 있지만, 다수에 포섭된 안정된 지위에서 다수의 손가락질을 피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감정적 호소일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되레 행복의 공간은 오롯이 자존적인 내 안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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