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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젊은 것들>에서 본 개별적 주체에 대한 기대


대상에 대한 호명에는 대상에 대해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신화가 담긴다. '명품'으로 호명되는 각종 고가 브랜드 제품들이 한 예다. 명품 소비자들은 제품의 실질적 사용가치보다 명품을 소유함으로써 타자보다 우월한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대중의 신화를 소비하는 데 기꺼이 막대한 돈을 지불한다. 그런 신화의 단면이 '짝퉁'이다. 짝퉁을 산다는 건 명품의 '정당한' 가치라고 믿어지는 만큼의 돈을 지불하지 않고 브랜드의 '객관적 신화'만 툭 떼어내 소유하고자 하는 행위다. 하지만 짝퉁을 산 사람 가운데 자랑스레 "나 짝퉁 샀어"라고 말하는 이가 드물 듯 짝퉁 소비자들은 명품의 가치가 '신화적'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대상에 대한 호명에는 권력의지도 담긴다. '386세대'라는 호명은 1996년쯤 등장했다. 카인즈 종합일간신문 검색에서 '386세대'를 찾아봤더니 1996년 12월16일자 한국일보 문화면에 처음 이 단어가 등장했다.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이라는 설명을 곁들이고 있었고, 1990년대 중반 보편화했던 386 컴퓨터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지금은 좁게 보면 1980년대에 대학에 다니면서 학생운동과 민주화 투쟁을 이끈 학생운동 세대로 보기도 하고, 넓게 보면 1960년대에 태어난 사람은 대학을 나왔든 나오지 않았든, 학생운동을 했든 하지 않았든 모두 386세대로 묶기도 한다. 요즘 좁은 의미의 386세대는 민주화 운동을 과거의 업적으로 치장하는 한편 아파트값에 신경 쓰고 자식 유학 보내기에 혈안이 된 '변절한' 학생운동 세대로 폄하할 때 주로 동원된다. 좌파의 담론을 늘 멋대로 전유하고 이용하는 극우 세력은 물론이거니와 좌파들도 그 폄하의 기제를 동원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게으르고 과문한 탓에 누가 처음 이 명칭을 썼는지는 찾지 못했지만, 왠지 궁금증이 인다. 왜 '386세대'로 불렸던 그들은 '87세대' 혹은 '6.10세대'로 좀 더 명징하게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했을까. 아니 일방적으로 호명 당하는 처지였다면 왜 그 명칭이 '객관적'이라고 인식하며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을까, 란 의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물리적 나이로 곧 30대를 지나갈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왠지 이 명칭을 받아들인 좁은 의미의 386세대들이 학생운동과 민주화 투쟁이라는 '명품'의 추억을 '짝퉁' 스러운 '386'이라는 컴퓨터 기호에 적당히 편승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때 민주화 투쟁을 했던 좁은 의미의 386세대는 정치성이 없는 '386'이란 기호로 인해 보편성을 지닌 넓은 의미의 386세대 일반으로 확장된다. 386세대는 여기서 나아가 나이대의 동질성만으로 누구나 엮일 수 있는 거대한 세대권력으로 변질되고, 진보적 정체성에 대한 책임감을 벗어던진 채 세대라는 껍데기만으로 덩그러니 온존하게 된다. 언론학자 남재일의 말에 따르면 이들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을 쳐다보면서 경제적으로 짭짤한 곳에 뿌리내린 자들, 인터넷에선 진보, 술자리에선 중도, 직장 가면 보수가 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청소년들이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을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오마이뉴스

반면 '88만원 세대'는 386세대와 달리 호명하는 자가 뚜렷했다. 2007년 경제학자 우석훈과 '말'지 기자 박권일이 공저한 '88만원 세대'를 통해 명명됐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시대 이후 이 땅에 바이러스처럼 퍼지게 된 비정규직 가운데 20대들의 평균 임금이 88만원이라는 계산을 토대로 한 명명법이다. 책이 폭발적으로 팔리며 '88만원 세대'는 20대를 상징하는 보편의 언어가 됐고, 우석훈은 '20대 당사자론'을 제기하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다 2008년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일어나면서 '88만원 세대'인 20대는 소위 '개새끼론'에 휩싸여 세대 때리기의 주요 타겟이 됐다. 줄 세우기 교육에 분노한 10대들이 촛불을 들었을 때 20대들은 토익 책을 들고 도서관에 처박혀 자기계발에만 집중하지 않았느냐는 질타가 좌파 일부에서 쏟아졌다. "더 이상 20대에선 희망을 찾을 수 없다. 10대를 보자"는 섣부른 주장까지 나왔다.


그 '좌파 일부'의 주된 구성원에 386세대가 자리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다수가 '인터넷엔 진보, 직장 가면 보수'가 된 386세대보다 여전히 치열하게 살고 있는 386세대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세대담론'은 20대에게 짱돌을 쥘 여유조차 주지 않은 사회 전체의 모순, 즉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론적 억압 체제를 은폐한 채 다분히 '세대끼리의 다툼'으로만 귀결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질서에 의해 형성된 계급적 명명법이었던 '88만원 세대'라는 담론이 계급투쟁 담론을 향해 나아가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권일의 반성적 회고대로 "글자 그대로 '세대론'에 갇혀버리는, 그래서 독 우물에 빠진 상황"이 된 셈이다. 그리고 극우 세력들은 다시 한 번 이 상황을 '세대갈등'으로 교묘하게 전유하며 뒤에서 미소 지었다. 이 역시 담론지형에 '88만원'이라는 기호에 담긴 계급의 문제보다 '세대'라는 기호가 가진 손쉬운 존재 규정에 대중이 '객관적으로 흥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신화가 작동했기 때문 아닐까.


최근 단편선과 전아름, 박연이라는,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이 펴낸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의 인터뷰 집 '발칙한 반란을 꿈꾸는 요새 젊은 것들'의 저자 서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몇 번의 회의를 거치며 우리가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보편적인 20대'에 대한 집착이었다. 네트워킹이 '날 때부터 자연스러운' 20대에게서 '보편'이 가능한지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중략)…이 책은 지침서가 아니다. 다만 이 책은 '도구'일 뿐이다.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삶을 살아가는 데 조금의 기여 정도는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대담론이 개인들을 뭉뚱그려 보편화하고 집단화할 때 세대 내부의 양극화와 같은 모순은 사회 전체의 담론에서 이탈해 당사자들에게만 짐을 지우는 도구가 된다. 세대담론이 보편성이라는 '객관적 신화'의 외피를 입을 때 세대를 아울러야 할 계급담론이 배제되고 망각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 글은 미디어스에 실렸습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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