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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중독 부부와 아이살해 여성에게 떠맡긴 공동체 윤리의 비도덕성

 

게임에 빠져 태어난 지 석달된 딸을 집안에 방치해 굶어 죽게 한 부부가 수원 경찰에 구속됐다. 부부가 매일 하루 4~6시간 정도 즐긴 게임이 가상의 세계에서 소녀 캐릭터를 키우는 종류라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받아들여졌다. '게임중독'이 단박에 검색 키워드가 됐고, 부부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경찰은 "자기 자식이 우선이지, 내 자식은 굶고 있는데 인터넷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우는데 빠져 내 자식을 굶어 죽게 했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며 법적인 재단 외에 '일반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도덕적 비난에 가세했다. 하지만 내겐 '게임중독'과 '친딸을 저버리고 키운 가상의 딸'이란 키워드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숨진 아이가 '2.25kg의 미숙아'였다는 사실이었다. 월세 20만원짜리 반지하방에서 별다른 직업도 없이 아이를, 그것도 다른 아이보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태어난 아이를 책임져야하는 건 오롯이 그들 부부 뿐이었을까, 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 3월4일자 한겨레 11면


같은 날 서울에선 한 30대 여성이 모텔에서 자신이 갓 낳은 아이를 질식시켜 숨지게 했다가 역시 경찰에 검거됐다.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남성과의 사이에서 생긴 딸이었다. 이 여성은 1997년에도 성폭행을 당해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자 아이를 낳은 뒤 같은 방법으로 살해해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역시 갓 낳은 자신의 아이를 두 번이나 살해했다는 점에서 '용서받지 못할 모정'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자기 아이를 두 번 죽인 비정한 모정'이란 키워드보다 더 눈에 들어온 건 '성폭행 범죄 혹은 채팅에 의한 일회성 만남'으로 생긴 아이에 대한 책임이 이 여성에게만 온전히 지워졌다는 점이었다. 성폭행당한 뒤 "여성이라는 사실이 싫어 남장을 하고 다녔다"는 여성의 진술에 이르러서는 개인에게 모든 걸 일임하는 한국 사회의 부도덕성이 읽혔다. 이 한 명의 개인이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마저 부인하고 싶어 했던 까닭이, 한국 사회가 개인의 개별적 처지는 철저히 배제한 채 '엄마'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떠안긴 양육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자기 아이를 살해한 죄로 감옥살이를 감수할 만큼이나 지기 어려운 굴레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어서 였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한국 사회의 범죄에는 사회가 내포한 모순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모순이 읽히는 지점은 범죄를 저지른 범법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범죄를 대하는 우리의 즉자적인 반응행위 영역이다. 석달된 딸을 방치해 숨지게 한 게임중독 부부나 갓난아이를 두 번 살해한 여성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부모나 엄마의 책임을 다 하지 않은 개인에게 철저하게 집중된다. 아이가 영양실조에 걸려 죽을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게임을 한 부부나 양육 책임이 싫어 직접 아이를 죽인 여성에게 우리는 '철없는' 혹은 '부모의 역할을 다 하지 않은 무책임함'이란 도덕의 결손으로 몰아붙인 뒤 그들이 가진 개별적 사연과 그들을 둘러싼 제도의 책임을 곧잘 외면하고 만다. 그 외면에는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비도덕적이지 않아'란 구별짓기가 담겨있고, '적어도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사회적 의무를 그렇게 쉽게 방임하진 않아'란 도덕적 우월감이 내포돼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구별지어 소외시킨 그들에게 책임을 다 하지 '못한'이 아니라 책임을 다 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부여할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목숨을 잃게 만드는 일처럼 비윤리적인 행위는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게임중독 부부나 영아살해 여성의 행위를 전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감싸 안기에는 무리수가 따른다. 하지만 문제는 개인의 윤리적 무책임함에 대한 비난에만 매몰된 채 행위의 책임을 모두 개인에게만 귀속시키고 외면하는 대중, 그리고 그 대중이 모여 이루고 있는 사회의 무책임함, 나아가 그 무책임함에 도덕적 우월성을 도구로 면죄부를 안겨준 채 소외된 개인을 감싸안아야 할 책임까지 슬며시 개인에게 전가하는 제도에 내재돼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맞벌이로 가계를 꾸리고 부모의 노후까지 책임지는 남성이나 여성에게 '능력자' 혹은 '슈퍼맘'이라는 우월한 지위를 부여할 때 사회의 도움 없이 미숙아를 키워야하는 부부나 성폭행 혹은 일회성 만남의 책임을 홀로 져야하는 여성에게 투영된 사회의 모순은 금세 은폐된다. 이때 치유되지 않고 고름처럼 남은 모순은 비슷한 범죄의 재생산에 적당하게 기여하게 된다.


▲ 3월6일자 한국일보 8면

모성이나 부성은 도덕적 의무로 강요될 본성이 아니다. 아이를 낳았을 때 발생하는 제 새끼에 대한 애정은 개별적인 인간이 또 다른 생명과 육체적이고 정신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운 지점에서 만나 자연스레 맺는 관계에서 파생되는 친밀함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 자연스런 친밀함을 빌미삼아, 아이의 삶 전체를 부모가 모두 껴안아야만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공동체의 윤리를 부여하고 양육의 의무를 강권해왔다. 이때 과도한 모성과 부성에 대한 강요는 내 아이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부를 축적하는 경쟁에 혼신을 다하는 부모, 내 아이가 경제력뿐만 아니라 학벌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까지 누리길 바라며 버는 돈의 절반 이상을 경쟁적으로 교육에 쏟아 붓는 부모, 노후를 케어받기 위해 결혼이라는 가족 제도 안에 내 아이를 온전히 포섭시키고 나아가 내 아이와 대등하거나 혹은 더 우월한 가족에 소속돼 다른 집 아이보다 번듯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배우자를 찾아주려는 경쟁에 열을 올리는 부모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 이면엔 그런 부모가 되기 위한 경쟁에서 소외됐다는 이유로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부모들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사회가 일정 부분 책임져야할 양육과 교육, 소외된 개인에 대한 복지는 여기서 철저히 개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으로 환원되고, 이런 제도 안의 개인은 또 다시 철저히 '도덕적인 개인'으로 공동체에 종속되기 위한 무한 인정투쟁에 빠져든다. 범죄는 이렇게 경쟁하는 무리에서 소외된 개인을 '굶어죽게' 방임하는 사회의 악순환이 낳은 기형의 산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법한 개인이 저지른 범법 행위에는 그 개인이 나와 같은 공동체 안에 존재하며 공동체 윤리의 영향력 아래 함께 놓여 있는 까닭으로 인해 그들의 책임 외에 내가 속한 공동체가 짊어져야할 책임도 더불어 발생하게 된다. 그들의 범죄가 그저 그들만의 책임이 아닌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이 글은 미디어스에 실렸습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83

*이 글을 쓴 뒤 보게 된 범죄심리학자인 경찰대 표창원 교수의 포스팅. 

http://v.daum.net/link/6079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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