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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초여름 한국은 '삼순이 열풍'에 몸살을 앓았다. 몸은 뚱뚱하고 이름은 촌티가 흐르는 여자. 결혼과 현실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해야' 한다고 강요받는 서른 살 여자란 시기적 비주류성에다 고졸 학력을 갖췄고 편모슬하이기까지. 갖춘 거라곤 날카로운 언변과 누구 앞에서도 꿀리지 않는 당당함 뿐이다. 하긴 그 두 가지마저 여자가 가지면 한국 사회에선 그다지 장점이 되지 못한다. '못 생긴 게 성질까지 더럽다'는 소릴 듣기 딱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순이는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지지의 바탕엔 두 가지 까닭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 '루저'인 그녀가 '밀땅' 연애를 하는 대상이 바로 얼짱에다 재력까지 갖춘 대표적인 엄친아 '삼식이'였기 때문이다. "삼겹살 출렁이는 주제에 감히 우리 삼식 오빠를 거부하다니!"라며 놀라던 대중은 삼순이가 삼식이에게 폭 안긴 해피엔딩의 순간, 그녀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뚱뚱하고 스펙 떨어지는 '루저'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 여성-한국 사회에서 '여자'는 그들을 내려 보는 명칭으로, '여성'은 그들을 존중하는 호명으로 기능한다-으로 칭송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녀가 대중의 추인을 받기 위해 안겨야했던 대상이 엄친아, 즉 남자라니. 결국 한국 사회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 그들이 원하는 조건에 부합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객체적 존재라는 실존성이 온전히 부각되고 말았다.
지난 늦여름부터는 '지붕 뚫고 하이킥'이 몰고 온 열풍에 한국 사회가 또 한바탕 독감을 앓았다. '준세커플', '지정커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고, 온갖 자발적 시나리오가 난무했다.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 세경과 지훈의 죽음을 암시하는 '충격적 결말'에 온 나라가 저녁 먹다 말고 잠시 멍때렸다. 곧 정신을 곧추세운 이들은 충격에 비례하는 만큼의 강도로 지붕킥 홈페이지를 마비시켰다. 김병욱 PD에 대한 원망이 쏟아졌다. '그렇게 고생만 한 세경이를 꼭 죽여야 했나', '시트콤이면 시트콤답게 만들어라'는 얘기가 주를 이뤘고, '신세경 귀신설'을 제기하는 음모론이 등장했으며, 암시적 결말을 빌미로 '세경이와 지훈이는 죽지 않고 함께 어디론가 떠났을 것'이란 희망 섞인 추측까지 등장했다. 현실의 배우 신세경이 "(극중) 세경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세경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김병욱 PD만 유일하게 내 생각에 동의해줬다"고 말했음에도 음모론과 추측은 끝간 줄 모른다.
그래서 되레 세경의 외모는 삼순이와 대조적으로 계급적 처지를 더 명징하게 확인해주는 장치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망가뜨린 외모로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살짝 비껴가며 계급배반 투쟁에 성공한 삼순이에 열광한 대중은, '예쁘지 않아도 득템할 수 있다'는 알량한 판타지에 들떴다가 현실에서 다시 한 번 외모로 구별 짓는 한국 사회의 배타성을 실감하며 희망고문만 진득하게 확인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김 PD는 외모를 갖추지 않고도 해피엔딩으로 끝났던 삼순이와 달리, 외모를 갖췄음에도 비극적 엔딩으로 산화할 수밖에 없는 세경을 장치해 판타지와 현실을 극명하게 대비시켰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까지 TV 드라마가 줬던 판타지에만 익숙한 채 불편한 현실은 늘 쉽게 외면하고 말았던 대중은, 판타지란 마취주사를 철저히 배제한 채 가혹한 현실의 고통을 오롯이 체감하라는 메시지를 남긴 지붕킥의 '극사실주의'에 분노로 대응하고 말았다. 매일매일 우리 눈앞에 떠 있는 이미지나 주변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공포를, 보통이라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현상을, 감정을 배제한 채 담담히, 때론 잔혹하게 묘사하는 극사실주의는 불편한 사실이기에 받아들이기 아플 수밖에 없다.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우리는 너무나 사실적이기에 비현실적이고도 이질적인 느낌을 체감한 적이 있지 않던가.
'심각한 드라마나 영화는 싫다. 그런 걸 볼 때라도 현실을 잊고 그저 즐기고 싶다'는 바람은 다분히 이중적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묘사된 현실은 비현실이면서도 현실이다. 드라마나 영화가 다루는 캐릭터와 플롯에는 그들을 유도한 객관적 사회현상이 묻어나 있다. 드라마를 보며 그때나마 현실을 잊고 싶다는 이들은 그래서 사실 드라마를 볼 때나 현실을 살 때나 주어진 처지를 마주보기 싫고, 주어진 상황과 맞장 뜨기 귀찮다는 말을 에둘러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렇게 녹록하던가. 해피엔딩 드라마를 보려면 먼저 바뀌어야할 건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 아닐까. 그런 면에서 드라마는 현실 회피의 도구가 아니라 현실 이해의 도구로 작동해야 할 것 같다. 그런 까닭으로 내겐 극중 세경이란 캐릭터의 죽음이 '호상'인 듯 느껴졌다. 먹먹하고 안타깝지만 고개를 주억이며 보낼 수밖에 없는 너를 향한 애가, 다시 돌아서 너를 데려간 그 곳과 덜렁 나 홀로 남겨진 세상을 향해 불끈 내뱉는 아우성 같은, 그런 죽음의 뒷길 말이다.
*이 글은 미디어스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