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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조금 있음

 

▲ 영화 '하하하' 공식 포스터

그러고 보니 거기도 술자리였다. "자, 마시자~", "건배~"로 시끌벅적했다. 술상 건너편에 앉은 85학번 선배는 89학번 선배의 눈앞에 검붉은 얼굴을 디밀고 "씨발, 니가 대체 후배들을 위해 한 게 뭐야?"라고 소리쳤다. 89학번 선배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만큼 눈이 한 움큼 풀려있었다. 흐리멍덩한 눈동자에선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하지?'라는 의아함이 읽혔다. 디지털시계는 새벽 2시를 찍었다. 그 앞에선 86학번 선배가 "아 씨발, 형 좀 그만해. 젠장할, 20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냐"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래도 85학번 선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옆에 앉았던 92학번 선배는 86학번 선배의 허리춤을 감싸 안고 "형, 그러지 말고 앉아"라고 애걸했다. 왜 애걸하지, 모두가 서로의 얘기를 듣지 않은 채 자기 말만 줄곧 해대는데, 싶었다.


그때 건너편에 앉아있던 동기 녀석도 역시나 불콰해진 얼굴로 말을 걸었다. 술상의 화제와는 동떨어진 말이었다. 녀석은 최근 한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에 가기가 싫어졌다고 푸념했다. 왜냐고 물었다. "평소 거기가 노빠들이 90% 정도 비율로 많은 곳이거든. 나는 중도보수지만 뭐, 그건 좋다 이거야. 그것 땜에 그 사이트에 가입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요즘 천안함 사태 터지고, 정말 가관이더라. 조선일보에 나온 '인간어뢰' 괴담만큼이나 거기도 '북한의 짓일 리가 없다'거나 '좌초가 확실하다'는, 별다른 근거도 없는 괴담스런 글이 올라오면 대대적인 지지를 받는 거야. 거기에 조금 의심하는 글을 실으면, '조중동의 논리에 놀아난다'거나 '무식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몰아붙여. 바보로 아는 거야 뭐야. 괴담을 괴담으로 맞받아쳐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젠장." '녀석, 뜬금없이 웬 천안함 얘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말했다. "자, 마시자."


홍상수의 열 번째 영화 '하하하'에서 조문경(김상경)과 방중식(유준상)은 청계산 자락에서 80년대와 90년대 학번들의 술자리처럼 연방 "건배", "마시자"고 말하며 막걸리 잔을 기울인다. 둘은 얼마 전 통영에 각자 여행 다녀온 것을 알게 되고, 그 곳에서 있었던 '좋았던' 일들을 조금씩 풀어놓는다. 캐나다로 이민을 결심한 문경은 인사차 어머니(윤여정) 집에 와 며칠을 머무르다 관광 해설가 왕성옥(문소리)을 만나 성옥에게 지분대는 과정을 얘기한다. 중식은 아내의 눈을 피해 애인 안연주(예지원)와 며칠을 보내기로 한 통영에서 시인인 후배 강정호(김강우)와 매일 술을 마시며 사람들과 만났던 경험으로 대구를 맞춘다. 둘은 같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엔딩 크래딧이 내려올 때까지 같은 사람들을 만났는지 모른 채 술자리를 접는다. 둘은 비루했던 경험을 듣고도 서로 격려하며 내내 낄낄댄다. 이게 영화의 시놉시스다.

▲ 영화 '하하하' 스틸


누군가는 "홍상수가 이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과도했던 어두움에서 벗어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변하기 시작하더니 '하하하'에서 완전히 밝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홍상수는 정말 '좋은 것만 보고 싶어진'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나도 문경, 중식과 함께 내내 낄낄댔으니까. 하지만 낄낄대면서도 왠지 찝찝했다.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아서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홍상수는 이번 영화에서도 역시나 속물근성을 가진 비루한 지식인들의 얘기를 풀어가는 와중에 기어이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한마디 메시지를 넣고야 말았다. 그건 홍상수가 유랑하다 '직관'으로 선택했을 것임이 분명한 통영이라는 도시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었을, 이순신(김영호)이라는 존재를 내러티브에 뜬금없이 삽입한데서 읽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홍상수의 변화는 인간 군상들의 속물성은 기본 전제로 깐 채 진정 하고픈 말은 변주를 통해 영화 속 어딘가에 숨겨두면서 발현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문경은 통영의 충렬사를 찾았다가 느닷없이 장군의 복장을 한 채 벤치에 앉아있는 이순신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이순신은 두말 할 것 없이 한국 사회의 '절대적인' 영웅이다. 성옥이 이순신의 영웅성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 관광객에게 "잘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이순신 장군은 영웅이 아니고 성웅이에요, 성웅. 왜 성웅이라고 하는지 알아요?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에요. 하긴 당신 같은 사람은 그때 태어났으면 왜구 한 명도 못 잡았을 거야"라며 마치 신실성을 부정당한 종교인처럼 흥분하는 모습은, 이데올로기라는 상징을 종교처럼 받아들이는 한국인들을 고스란히 직유한다.


하지만 현재 시점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뜬금없이 갑옷 입은 이순신이라니. 그건 사실 현재 시점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유령처럼 등장한 이순신만큼이나 한국 사회가 바라보는 '이순신'의 이미지가 그만큼 물화(物化.reification)1)한 대상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1968년 군사정권 아래 광화문에 동상이 세워지며 공유됐던 이순신은 홀로 국가를 지켜낸 '영웅'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오며 이순신의 상징은 바뀌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그려진 이순신은 국가를 지키는 영웅적 활약보다 '국가'로 대변되는 왕의 견제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고뇌하는 개인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 영화 '하하하' 스틸


이는 국가에 헌신하면 모든 걸 지켜주겠다던 군사정권 시대에서 국가와 기업 등으로 대변되는 모든 공동체에게 배신당한 개인들의 시대로 대중의 존재 영역이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믿을 건 가족 혹은 자신 밖에 없어진 개인들은 줄기차게 내면세계로 파고 들어갔다. 2000년대 초반부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마음읽기' 책들을 접하고 있는가. 이때 대중은 이순신과 같은 '국가적 영웅'도 내면의 욕망에 의해 추동될 줄 알거나 혹은 외부의 관계에 의해 흔들릴 줄 알거나 하는 하나의 개인일 뿐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이순신'이라는 상징은 고정돼 있지 않았기에 물화한 대상이라는 점을 홍상수는 뜬금없는 이순신의 삽입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문경아, 너 눈 있지. 니 머릿속에 남의 생각으로 보지 말고 니 눈으로 보아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해 봐라. 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해라. 그 속에 제일 나쁜 것이 있다. 난 좋은 것만 본다"고 훈시하는 이순신의 말이라니. 유령처럼 뜬금없이 등장한 이순신의 말은 여기서 문경에게 닿지 않고 겉돈다. 이는 엇갈리는 문경과 중식의 대화에서 읽을 수 있다. 둘은 같은 대상들을 만났지만 결국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서로의 경험을 통해 같은 대상이 같은 대상임을 공유하지 못한다. 그들은 경험을 말로 바꾸어 서로에게 닿으려 하지만, 개별적 경험은 바로 앞에 앉아 소통하려는 타자에게도 제대로 닿지 않는다. 이 닿지 않음은 결국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산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안에서만 갇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너와 나의 관계가 오롯이 존재증명을 할 수 있는 수단은 소통이 아니라 되레 불화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홍상수는 결국 이번 영화에서도 '좋은 것만 보는' 것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과 닿아있음을 얘기하며 여전히 희망을 던지기 싫다고 얘기하는 듯 보였다. 천안함 사고를 보는 두 가지 괴담에 대해 격분하는 동기 녀석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의 사실관계마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식으로 종교화한 이념의 도구로 전유하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내겐 '하하하'가 그런 우리에게 지독한 썩소를 날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뭐 어때, 말은 결국 말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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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화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인간관계나 행위 혹은 사물 세계의 법칙에 따라 대상을 판단하는 작용을 일컫는 말로 마르크스의 단편적 개념을 게오르크 루카치가 개념화했다. 하나의 사물을 인식하는 자신의 주관적인 인식이 마치 객관적인 시각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 물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은 미디어스에 실렸습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56

댓글
  • 프로필사진 wooscho 곽경택과 유오성, 홍상수와 김상경, 봉준호와 송강호, 이창동과 설경구, 페르소나...왠지 의리있고 멋져보여 좋다.

    이젠 명배우와 명감독만 탄생하면 될 차례... 누군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대가 있다는건...멋진일이 아닐까?

    이 커플들처럼... 영화내용은 아직보질못해 패스~ 어제 98년중순 KINO(나의완소아이템중)에 홍상수가 데뷔한

    기사를 봤는데...(돼지가 우물에 빠진날) 홍감독 당시 그냥 너무 순수하고 어리버리해 보이는 사진이 인상적이었다.ㅋ

    모습은 세련되고 슬로우템포로 변했지만 당시 가졌던 디테일과 컨셉을 십몇년째 냉정히 유지한다는게 어렵지...

    자본의 유혹과 신분변동에 따른 위치경영을 하지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로 초심을 현실화하기란...솔직히 힘들지...

    더구나 '배우'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수많은 진짜 배우들이 그의 작품엔 노게런티로 봉사하고 싶어 줄서있지 않나?

    홍감독...진지한 모니터링이 필요한 개념인으로 추가~! 다만 신중하고 중립적으로...아닌건 아닌거지...긴건 기고...
    2010.05.27 10:35 신고
  • 프로필사진 B급 낭인 [이재훈] 그럼그럼~무조건적인 찬양은 아니지요..
    그의 '지겹지만 지겹지 않은 반복'을 계속해서 주시하자고요..ㅎㅎ
    2010.05.27 19:3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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