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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이후 4년마다 월드컵이 오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몸이 발그스레 달뜬다. 2002년 이전의 월드컵은 덩치 큰 동네 형들과 싸우러 나갔다 잔뜩 매 맞는 우리 형을 보는 기분이었다. 늘 위축됐고 한탄스러웠고 지레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2002년부턴 달랐다. 한신대 김종엽 교수는 이 감정을 두고 "2002년 한국 대표팀의 연이은 승리가 준 일종의 외상적인 체험으로 쾌적한 만족과는 상이한 어떤 한계의 돌파로부터 밀려든 과도한 쾌락, 일종의 희열"이라고 분석했다.



그랬다. 과도한 쾌락에 잔뜩 달뜬 사람들은 자신의 한 몸으로 오롯이 감당할 수 없는 폭발적 흥분을 분출하기 위해 광장으로 달려나와 남 보란듯이 "대~한민국"을 외쳐댔다. 광장에는 그래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군집했다.


한국 근대 사회에서의 광장은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와 빌딩은 한국인들에게 여유 공간을 앗아갔다. 한국인들은 그래서 놀기 위해 방으로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노래방, 소주방, PC방, 비디오방은 그래서 나왔다.


문화평론가 정윤수는 "뻐꾹새와 보름달이 삶의 피로를 덜어주던 시절에는 그래도 마당이 있었고 우물이 있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멧돼지가 좌충우돌로 달리는 식의 저돌적 근대화는 한국인의 마당, 그 광장성을 모조리 거세했다. 광장이 아니라 주차장을, 장터가 아니라 거대한 쇼핑센터를, 이웃이 아니라 익명의 생물체 옆에서 고독하게 살아가게 했다"고 지적했다. 공동체의 성원들이 함께 일하고 쉬며 오늘의 고달픔과 미래의 희망을 함께 나누는 빨래터가 없었던 것이다.


월드컵이란 공통의 관심사는 IMF 구제금융 이후 국가와 직장에서 '배신'당하고 개별적으로 분절돼 파편처럼 살아가던 한국인들에게 일시적 공동체를 다시 형성시켰다. 게다가 1987년 6.10 민주화운동 이후 정치적으론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해놓고도 1997년 이후 경제적으론 공동체를 박탈당해버린 한국인들은 이제 '얼마나 즐겁게 살 수 있느냐'로 관심사를 돌리기 시작했다. '잘 노는 것이 잘 사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그래서 광장이 열렸다.


2002년의 이 월드컵 군중에 대해 해석이 분분했다. 보수와 진보적 이데올로기에 찌든 이론가들은 새로운 주체들의 탄생에 과거의 이데올로기를 투영하려 애를 먹었다. '집단적 히스테리'라는 사람이 있었고, '광장의 붉은 파시즘'이라고 경계하는 이도 있었으며, '국가주의적 열정'이라고 환영하는 이들도 있었고, '민족주의적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오류는 이를 획일적 집단으로 보려하는 데 있었다. 상지대 홍성태 교수는 "이 현상은 겉모습과 달리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에, 집단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요컨대 붉은 악마 현상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추구하는 것의 한 양상일 뿐이다. 이것을 국가나 민족을 앞세우는 집단적 히스테리나 국가주의적 열정으로 읽는 것은 정치적인 좌와 우의 차이를 떠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붉은 악마는 국군의 날에 시가행진하는 군인들의 획일적인 국방색 물결과는 다른, 서로 다른 하나들이 모자이크 식으로 전체를 이루는 개인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보수의 국수주의적 해석만큼이나 진보의 계몽주의적 해석도 비판에 직면했다. "거리응원에 나선 그 젊은이들의 입에서 선거감시운동 같은 시민사회 캠페인이 벌어졌더라면 더 좋았다"는 지적은 그래서 시대착오적이란 역풍을 맞았다. 정윤수는 이에 대해 "인간 내면의 행동동기는 작용-반박용으로 움직이는 물리학의 기계가 아니다. 그 응원열기를 당장의 정치적 캠페인이나 시민운동 차원으로 견인하려는 것은 행동동기의 복합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건전한 즙을 짜내려는 피상적 계몽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했다.


김종엽 교수는 여기에다 민족주의 이상의 감정을 읽는다. 그는 "IMF로 인해 사회 성원이 겪은 경제적 심리적 고통, 그리고 상처입은 민족적 자긍심과 관련된 것으로 멀게는 근대화 과정 내내 우리 안에 침전되어 버린 어떤 서양 중심주의, 자기 모멸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축구는 이런 상처입은 민족주의를 씻어내 줄 무엇으로 상징화했다"고 분석했다. 민족주의적 자기 모멸이 월드컵을 통해 역설적으로 민족주의를 해체하기 시작한 셈이다.


대중은 월드컵이란 '허가받은 일탈의 시간'에서 쾌락을 느끼고, 일상의 안정을 벗어나는 혼란의 상황, 즉 과잉을 경험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깨닫고 나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새로운 나로 재탄생한다. 경희대 이택광 교수는 이를 '월드컵 주체'라고 명명했다.


이택광에 따르면 월드컵 주체는 1990년대 이후 전면화한 소비주의를 세계관으로 채택하고 '대한민국'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386과는 사뭇 다른 이들은 이념보다 쾌락을 중심으로 정치성을 구성한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월드컵의 '오~필승 코리아'를 통해 완벽하게 국민에게 쾌락을 제공해준 상상 속 '대한민국'의 이미지는 현실로 돌아오면 언제나 결핍을 안겼다. 2008년의 촛불은 그런 의미에서 월드컵에서 상상했던 '정상국가'와 다른 '미국산 쇠고기로부터 국민을 지켜주지 않는 비정상적인 국가'에 대한 저항과 결핍에 의해 탄생했다. 2002년이 단순히 스포츠 행사가 아니었고 2008년의 촛불이 운동권과 분리된 주체였던 까닭이다.


11일이면 다시 카니발이 열린다. 국가나 붉은 악마, 또 그에 호응한 대중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얘기하며 질서정연하게 응원하고 깨끗이 청소하자고 호소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시민의식일까. 정윤수는 "진정한 시민의식은 좀더 자유롭게 뛰놀고 싶은 마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인격과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려는 내면의 갈등과 투쟁"이라고 말한다. 축제에서 술에 취한 젊은이나 쓰레기는 방종이나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 "저 친구 너무 퍼마시다 보니 맛이 갔군"이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에피소드일 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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