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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인앤아웃 no.39

 

5년 전 한 선배의 소개로 만난 재일교포 3세 김향청(33)씨의 글을 읽게 됐다. 김씨의 할아버지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1912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령 때 생활수단을 잃고 만주를 거쳐 일본에 정착했다. 식민지 때 할아버지는 한반도에 살든 일본에 살든 '일본인'이어야 했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할아버지는 '외국인'이 됐고, 일본 정부는 1947년 할아버지의 외국인등록증에 '조선'이라고 표기했다. 당시는 남한도 북한도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조선적(朝鮮籍)이 탄생한 배경이다. 현재 대략 7만여 명의 조선적 교포가 일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이 수교를 맺으면서 많은 이들이 표기를 '한국'으로 바꿨다. 하지만 김씨와 가족들은 조선적을 유지했다. 김씨는 "나와 내 가족은 분단된 한반도의 어느 한쪽의 국적도 갖고 싶지 않다. 분단정책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언젠가 '한반도' 국적을 가질 날이 왔으면 한다고 했다.


북한 축구대표팀의 정대세(26)는 16일 남아공월드컵 브라질과의 경기 전 국가가 흘러나오자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몸을 떨며 뜨겁게 울었다. 축구인으로서 월드컵 본선에서 뛸 수 있다는 감동에 더해 국가를 들으며 공동체 안에 속하게 됐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경계인으로서 불안정한 지위를 가져왔던 삶, 재일교포로서 일본이란 집단사회에서 당했던 온갖 배척의 설움이 역설적으로 재확인되지 않았을까. 아주대 사회학과 노명우 교수는 이에 대해 "국가 내부에 포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는 성가신 틀일 수 있으나 정대세처럼 국민으로 포획되지 못한, 모호한 국민의 지위를 갖고 있는 디아스포라적[각주:1] 존재에겐 국민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과 국가대표가 되어 월드컵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황홀한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대세의 할아버지 역시 경북 의성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한국' 국적, 어머니는 '조선적'이다. 정대세는 아버지를 따라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를 조총련계 민족학교에 보냈다. 자연스레 그들의 문화와 습속에 익숙해졌다. 고3때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간 자리에서 정대세는 "꼭 조국대표가 돼서 평양으로 돌아오겠다"고 결심했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경계인으로 남고자하는 김향청씨와 달리 정대세는 지금 하나의 공동체와 접합하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대세를 보면서 '국민이 되는 감동'을 얘기했지만, 이 지점에 이르러 국적이랑 개념 규정에 의문이 든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인이고, 일본에서 태어나면 일본인이란 규정이라면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 국적 혹은 조선적들은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가. 한국 사회의 단일민족 순혈주의와 일본의 배타적 민족 혹은 국가주의는 국적의 개념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천안함 사건을 일으켰다'는 북한 정부의 폭력성에 분노하던 한국인들이 북한 인민들을 북한 정부와 구분지어 그들에게 친숙함을 느끼는 양가적인 태도는 상당히 징후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던 국민이란 개념에서 '국'과 '민'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상징이지 않을까 싶어서다.


디아스포라라는 주제에 천착해온 한국 국적의 재일조선인인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교수는 이를 두고 "사람을 국민이냐 아니냐, 우리 민족이냐 아니냐, 우리 국경 안에 사느냐 밖에 사느냐로 가르려는 시각 자체가 의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기 이전에 그저 존재하는 하나의 삶 그 자체로 오롯할 순 없을까.

 

 

  1. 디아스포라란 특정 인종 집단이 기존에 살던 땅을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으로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유목과는 다르며, 난민 집단 형성과는 관련돼 있다. 난민들은 새로운 땅에 계속 정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디아스포라란 단어는 이와 달리 본토를 떠나 항구적으로 나라 밖에 자리 잡은 집단에만 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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