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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을 기다렸지만 신은 그에게 44분만 허용했다. 평생 늘 머리 속에 그렸던 결정적인 골키퍼 1대1 찬스도 있었지만 신은 다시 한 번 폭우를 내려 그의 축발을 흔들어놨고, 골키퍼를 스치며 골대로 향하던 공의 속도도 줄여놨다. 2002년 충격의 대표팀 탈락, 2006년 불의의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12년 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동국(31)의 간절했던 월드컵 도전은 그렇게 끝났다.


이동국의 도전은 한국 축구의 도전사와 궤를 같이 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0-5로 대패하며 한국 축구를 좌절시켰던 네덜란드 전에서 후반 34분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세계 최고의 골키퍼 에드윈 판데르 사르(40)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19살의 이동국은 좌절을 딛고설 한국 축구의 미래였다.


하지만 실패한 한국 축구가 바뀌려면 이동국도 바뀌어야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을 맡은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이동국을 신뢰하지 않았다. 수비와 공격을 막론하고 입에 거품이 일 때까지 뛰며 쉴 틈없는 압박으로 상대를 제압했던 히딩크 축구는 한국 축구의 대안이 됐지만, 20여 년 동안 한국 축구를 배우며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의 움직임과 결정적인 한방만 머리와 몸에 주입 당했던 이동국에겐 사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히딩크 축구는 187cm의 큰 키로 미드필드에서 올라오는 크로스의 타깃이 되고, 상대 수비를 끌고 다니는 움직임으로 다른 공격수의 공간을 창출하며, 강력한 발목 힘으로 폭발적인 슈팅을 날리던 이동국에게 또 다른 무언가를 요구했다. 히딩크에 의해 눈이 높아진 축구 팬들은 그에게 "게으른 천재"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남아공월드컵에서 강력한 압박 축구로 히딩크 축구의 한국화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시연한 한국 축구팀에서 이동국은 아르헨티나 전에서 6분, 우루과이 전에서 38분 동안 교체 출전했다. 월드컵 직전 당한 불의의 부상 불운 탓도 있었지만, 결정력보단 전 선수의 압박에만 매몰된 -염기훈의 줄기찬 기용은 이를 잘 보여준다- 허정무 축구의 전술적 한계에 의해서도 그는 배제당했다. 우루과이 전 프리킥 상황에서 연결된 이청용의 골은 사실 큰 키의 이동국이 4명의 수비수를 몰고 경합해준 덕이 컸지만, 거기까지가 이동국의 한계였다.


신이 내린 불운이든 아니든 황금 같은 찬스를 놓친 그의 아쉬운 골 결정력은 이번 대회에서 경기를 압도하고도 결정적인 슛 찬스를 여러 차례 놓친 한국 축구의 모습을 그대로 상징했다. 어릴 때부터 스포츠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승리에만 매몰된 채 생존 경쟁에만 내몰리는 학원 축구 환경, 창조적인 플레이를 펼치려면 그게 곧 ‘이기적인 플레이’로 매도당하고 선배들과의 위계질서에 위축돼 자신의 능력을 한껏 펼치지 못하는 팀 내외적인 분위기, 한국을 대표해 큰 경기에 나설 수 있는 능력 하나 때문에 실수 하나에도 온갖 악플과 비난으로 가끔은 일상적인 삶까지 파괴해버리는 일부 팬과 네티즌들의 과도한 응원 문화. 그 속에서 그들의 압박 축구만큼이나 주변에 의해 압박 당해온 선수들에게 우리는 한국 축구의 한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무작정 전가해온 건 아닐까.


이동국은 27일 우루과이 전 뒤 허탈한 표정으로 "너무 허무하게 끝났다. 내가 상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했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정리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고 털어놨다. 결국 이동국은 히딩크 축구 이후의 한국 축구가 어떻게 변해야할지, 히딩크의 접목 이후에도 고질적으로 남아있던 한국 축구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선수들만이 아니라 한국 축구를 이끄는 축구인들과 한국 축구를 응원하는 팬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스란히 보여준 뒤 쓸쓸히 돌아섰다. 그런 그에게 누가 비난을 가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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