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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엇갈린 선택을 했다. 하지만 선택에 따른 결과는 비슷했다. 기업에서 쓰일 '부품'을 찍어내는 하청공장이 된 대학, 체제에 대한 비판적 회의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공부하는 인문학마저 취업률 수치로 평가하는 대학에 속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은 대학에 대해 거부 선언을 했고, 한 사람은 '거부' 조처를 당했다. 거부를 선언하며 대학을 박차고 나온 이는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언론은 앞다퉈 그를 인터뷰했고, 동조와 찬사, 반박과 냉소의 담론이 이어졌다. 붙였던 대자보와 같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을 단 책에 대한 리뷰와 저자 인터뷰도 곳곳에 게재됐다. 

노영수(오른쪽)씨 @출처:오마이뉴스

반면 거부 조처를 당한 이는 별다른 눈길을 끌지 못했다.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하고 그를 퇴학시킨 대학의 동료 학생들이 개교 91주년을 기념한다며 나선 국토대장정에 발맞춰 무릎이 부서져라 삼보일배를 했지만, 신문에선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은 중앙대가 대학에 기업식 구조조정을 도입한 첫 사례라는 측면에만 집중했다. 거부를 선언한 이는 고려대 자퇴생 김예슬(24)씨이고, 거부를 조처 당한 이는 중앙대 퇴학생 노영수(28)씨다. 둘의 발화는 방식이 달랐을 뿐 메시지는 같았다. 하지만 김예슬 담론에선 김예슬이 가리키는 달보다 손가락을 뻗은 주체가 더 화제가 됐고, 노영수 담론은 손가락을 내민 주체는 투명인간으로 존재한 채 그가 가리키는 달에만 눈길이 뻗쳤다. 왜 이런 간극이 생겼을까.


우리신학연구소 엄기호 연구위원은 최근 '대학 위기 담론'의 허구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모두 '대학이 죽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엄기호, ‘김예슬 읽기, 속물과 동물 사이 어디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5월호) '김예슬 선언'은 이런 가장 무도회에 대한 사망선고다. 엄 위원은 김예슬이 '대학이 죽었다'고 선언하자마자 '대학 위기 담론'이 사망했다고 봤다. 그럼에도 교수부터 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학이 '사망'했다고 말하지 않고 '위기'에 빠졌다고 말했다. '위기' 담론에서 여전히 대학은 회생 가능하고, 그것을 회생시킬 수 있는 주체가 있으며, 대학생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바로 세우는 데 중요한 주체로 가정되는 반면, 대학 밖 주체들은 주체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 견해를 차용하자면, 우리는 결국 김예슬의 전복 선언이 가지는 '한계'를 뚜렷하게 인지한 채 김예슬을 바라본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소위 말하는 '명문대'를 거부하고 나온 김예슬의 '용기'를 칭찬하면서도 김예슬 선언으로 '사망한 대학' 그 너머의 체제에 대한 담론을 끌고 갈 '만용'을 부리지 못했다. 그건 '80%가 입학하는 대학을 나오지 못했을 때 감내해야할 사회적 편견'이 두렵기도 해서이고, '하청공장에서 부품이 된 뒤 기업에 편입되면서 주어질 물적 토대' 외의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기득권을 부정하고 정의를 추구하다 지금은 세상과 타협해버린 자신의 한계'에 매몰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학 너머의 그 무엇을 보려하지 않고, 김예슬만 바라봤다. 여기서 김예슬은 체제에 편입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나마 삶을 돌아볼 거울이 될 대리만족의 대상이거나 혹은 책임을 떠맡기고 스스로는 현실에 굴종하고 있는 우리 삶에 위안을 주는 대표선수로 기능했다. 결국 김예슬은 우리의 지독한 현실 너머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인식됐을 뿐이었다. 그 너머의 세상을 우리의 것으로 상상하기엔 벅찼던 걸까. 가리키는 달보다 손가락만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건 그래서가 아닐까.


김예슬씨 @출처 : 나눔문화



노영수는 달랐다. 노영수는 철저하게 우리가 사는 지독한 현실 그 어딘가에 존재했다. 노영수는 한 인터뷰에서 '김예슬 선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정의도 진리도 실종된 대학을 떠나겠다는 선언이었는데, 나는 대학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학교 생활에 상당히 만족했다. 과 교수님들은 항상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고, 수업 외적으로도 많은 것을 공부하고 고민할 수 있었던 대학 생활이었다. 철학과 진리가 실종된 대학의 현주소에 김예슬 씨의 비판과 자퇴 선언엔 공감하지만, 나는 반드시 학교로 돌아가서 싸우고 싶다." (프레시안 선명수 기자, "나는 대학에서 쫓겨났다. 아니, '두산대'서 해고됐다", 2010년 5월 13일)


고공시위를 한 뒤 '신축공사가 중단돼 피해를 입었다'는 중앙대로부터 2469만원가량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할 위기에 처하고, 삼보일배를 하며 무릎보호대가 없어 지역민들에게 겨우 도움을 받고, 소진된 체력을 보충할 끼니조차 넉넉하게 채우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 물적 토대를 가진 노영수는 철저하게 현실 안에서 바득대며 싸우는 우리 주변의 그 누군가일 뿐이었다. 노영수는 그래서 투명인간이 됐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현실의 불편함에 대해 얘기하는 존재, 공고하게 굴러가는 거대한 자본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비슷한 위치 그 어딘가에서 목소리를 내는 존재지만 늘 우리 주변에서 "고립되어 지쳐가는"(삼보일배를 하던 와중 그에 대한 칼럼을 쓴 필자에게 보낸 노영수의 문자메시지), 잊혀진 존재였던 셈이다.


백혈병으로 쓰러지는 순간까지 삼성 자본의 모순을 호소했던 고 박지연씨,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항거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1인 시위를 하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월급 64만 1850원을 받다가 정리해고된 뒤 이어간 5년 간의 출근투쟁 끝에 법원으로부터 '업무방해 행위' 결정으로 출근하면 하루 100만원씩 벌금을 내야하는 처지에 이른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모두 척박한 현실 그 어딘가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우리에겐 투명인간과 같은 존재들 아니던가. 노영수가 가리키는 달, 즉 중앙대의 일방적 구조조정을 보고 문제점은 인식하지만 정작 가리키는 손인 노영수를 외면하는 인식에는 중앙대를 지배하고 있는 '극복 불가능한' 현실자본과 싸우는 우직한 '우매함'에 대한 배제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민이 직접 참여하여 도시 공간을 하나씩 만들어 가자는 주민참여운동에 대해 다룬 책 '시민이 참여하는 마치즈쿠리'(한울아카데미 펴냄)의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우리는 지나온 역사에 대해서는 '민중'의 힘 덕에 가능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현실정치에서는 '메시아'적인 지도자를 원한다. 그 괴리를 어찌할 것인가?" 김예슬과 같이 체제를 뒤흔들고 현실 그 너머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개인을 일종의 판타지로 바라보고, 노영수와 같이 지난한 현실 그 어딘가에서 바득대며 싸우는 개인은 철저한 배제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들의 현실에서 함께 엄존하는 우리의 존재는 결국 의존적 투명인간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미디어스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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