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인앤아웃no.36 1996년 4월5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양형섭 의장이 "한반도 전쟁은 시간문제라 위협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정부는 대북 정보감시 체제를 워치콘2로 강화했고, 미국은 북한에 "정전협정을 준수하고 도발행위를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이튿날 북한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 중무장 병력을 투입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으며, 공로명 외무부장관은 주한 미국 대사와 한.미 공조를 논의했다. 9일엔 공동 대응책 협의를 위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틀 뒤 15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고,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139석을 얻었다. 과반에 11석 모자란 승리였다. 14년을 건너뛴 20일, 한나라당 정부는 천안함 사건을 "북한의 소행"이라 결론짓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채 꽃펴보지 못한 젊음들이 의무와 법의 강제란 이름으로 집총했다가 차가운 물속에서 하나 둘 스러져 갔다. 익히 예상은 했지만 사고 이후 한동안 뿌옇게 부유했던 죽음은 함미가 인양되고 주검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더 이상 부인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실체가 되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어야 했던가. 그 물음에 대답해야할, 그들을 차출했던 국가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런 와중에 침몰 사고의 원인과 정부의 대처에 대한 온갖 의혹과 정치적 해석이 난무하고 있다. 보수 신문은 사건 초반부터 별다른 근거도 없이 북한 공격설을 제기하며 안보를 상업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익히 예상했던 대로다. 반면 진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안보 상업주의의 대척점에서 북한 연계설의 여론 확장을 막는 안티로서의 존재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