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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백화점 모녀’ 사건에서 분노는 대체로 모녀에게 집중됐다. 상대적으로 ‘을’의 위치에 있는 서비스 노동자에게 ‘갑’의 위치에 있는 소비자가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소비자라는 정체성은 마주한 서비스 노동자에게 화폐로 교환하는 제품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면서 마음껏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권력이다. 소비는 소비자에게 권력을 쥐여주고, 화폐를 매개로 한 권력관계에서 서비스 노동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거듭 확인해준다.

그런데 일부에서 ‘부당함에 맞서 패기있게 저항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백화점 주차장 알바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갑질만 욕할 게 아니고 주체의 자성도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알바생이 소비자와 서비스 노동자 사이의 권력관계라는 구조에 무릎 꿇지 말고, 하나의 당당한 주체로서 저항하라는 의미였다.

여기서 우리는 차분히 두 가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알바생은 무엇에 대해 ‘자성’ 해야 했던가. 그리고 이 알바생은 어떤 행동으로 저항해야 했던가. 여기서 알바생의 저항은 여기서 단순히 무릎을 꿇지 않고 모녀에게 당당히 맞서는 것일 수 없다. 그런 저항은 패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아무런 제도적 보호가 없는 상태에서 서비스 노동자가 소비자에게 맞서는 것은, 그 자체로 더 이상 그 직장에 다니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인식된다.

저항은 그런 방식이어선 안 된다. 우선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부당함을 공유하고 연대체를 조직해 소비자에게 권력을 부여한 사용자에게 문제점을 따져 묻고 재발 방지책을 요구해야 한다. 외부 사회에 모녀의 부당한 행위를 알려 공론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회에 저항의 연대를 호소하기 위해서다.

이번 사건의 경우 알바생은 후자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러니 나는 이 알바생이 도무지 어떤 자성을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주차장에서 하루종일 매연을 마시며 서비스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일로 대학 등록금을 벌어야 할 처지에 있는 청년이 무모하게 일자리를 버려가며 했어야 했던 저항은 어떤 것인가. 되레 자성은 모녀를 향해 격분의 감정을 배설하는 곳에 머무른 채 성찰적 분노를 구성하지 못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그런데 정작 문제는 알바생의 문제점을 지적하던 이들이 이런 사실들을 모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알바생이 어떤 방식으로 저항해야 하고, 알바생의 저항에 발맞춰 사회는 어떤 저항의 연대를 구성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그런 걸 몰라서 그러는 줄 아느냐’ 혹은 ‘권리는 아무도 우리 손에 쥐여주지 않는다.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말은 최근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그들의 말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적 이성비판>에서 냉소주의는 ‘계몽된 허위의식’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중간계급은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평균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이 되길 원한다. 그들은 사악한 현실을 타파할 참된 의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이를 실행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의식은 알고 있지만 실행하지 않는 껍데기, 즉 허위다.

지난번 글에서도 말했듯, 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어느 정도 자산을 가진 이 중간계급들은 “체제 안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지배 계급을 비판하고 ‘나름 합리적인 사람’으로 인증받는 장치로 활용하기 위해” 분노한다. 이들의 분노는 대체로 “사건과 연계된 특정 인물에 감정을 배설하는 정도에 머무르”는 격분이거나, 사건 피해자로서 ‘주체성을 형성’하는 좋은 경험 정도에 머무르는 ‘착한 분노’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런 분노는 허위 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런 허위 분노, 즉 냉소주의는 계급 간 연대를 구성할 수 없게 만들어 체제를 존속하는 데 이바지한다. 체제의 존속은 또다시 하층계급의 냉소를 부른다.

중간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현재의 체제를 전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중간계급에 필요한 저항은 집단의 저항이 아니라 개인의 만용에 머물러야 하고, 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주체의 자성에만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장면 역시 ‘분노와 냉소의 계급화’의 한 증상 아닐까.

*방송대학보에 실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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