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인앤아웃 no.7 아이는 말을 잃었다. 바싹 마른 입술은 이따금 불안하게 달싹이며 뭔가 말을 만들어내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소리로 맺히는 일은 없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혹시 설명해도, 그게 사실이라고 증명할 방도가 없다. 눈동자는 깊이를 잃은 채 마치 흐린 유리창 같다. 들여다봐도 안쪽이 잘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어디에도 초점이 맺혀 있지 않다. 바라보는 것은 가상의 한 점에 지나지 않았다. 질문에 반응하는 아이의 고갯짓은 행동반경이 고작 1㎝도 되지 않았다. 깜빡 놓쳐버릴만큼 작은 움직임이었다. 아이는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남은 빈 허물처럼 보인다. 성인에게 수없이 반복적으로 강간당했다. 자궁 내부에도 상처가 있고, 난자의..
이재훈의 인앤아웃 no.6 2009년 현재 온갖 미디어는 '서민'을 호명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정부 정책 발표에도, 뉴스에도 서민은 족족 등장한다. 어느덧 우리도 서민이란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리곤 한다. 언론재단 기사 검색에서 서민이란 단어를 찾아봤다. 종합일간지에서 2008년 한 해 동안 '서민'은 모두 1만183번 쓰였다.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5338건보다 1.9배, 10년 전인 1998년 2184건보다 4.7배 늘었다. 우리를 서민으로 불러주는 정치인과 공무원, 언론인이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왜 그럴까. 서민은 왕조 시대 단어다. 아무 벼슬을 갖지 못한 사람, 즉 평민이란 의미였다. 왕족 이하 특권층인 양반, 그리고 평민과 천민 등 신분계급이 명확한 시대였다. 당연히 서민은 정치적으로나 ..
이재훈의 인앤아웃 no.5 녀석은 늘 웃음이었다. 독실한 신자로 술을 삼가는 녀석은, 모임마다 끝까지 남아 독주의 고통에 허덕이는 선후배를 챙겼다. 이사를 도우러가면 목장갑을 낀 녀석이 늘 한쪽에서 끙끙대며 짐을 옮기고 있었다. "넌 좀 그만 와도 돼"라고 핀잔주면, 씩 웃고 말았다. 4수로 뒤늦게 4년제 대학 3학년이 된 후배 효준(28)이는 그러던 어느 날부터, 모임에도 이사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 녀석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묻어나지 않았다. "보습학원 비정규 강사로 일해요"라고 했다. 처음 넉 달은 80만원, 이젠 100만원 받는다. 오후 3시부터 자정까지 꼬박 수업한 대가다. 때문에 녀석은 대학 강의를 오전에 몰아서 듣는다. 4.2점을 웃돌던 학점은 3점을 겨우 넘긴다. 밥값과 교통비로..
이재훈의 인앤아웃 no.4 잠시 웬일인가 했지만, 역시 그뿐이었다. 6일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28)씨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한국인이 모욕죄로 처음 기소됐다. 제도가 누군가를 처벌하는 일이 그다지 기뻐할 일만은 아님에도, 그날의 기소문은 우리 안에 깊숙이 박힌 순혈주의와 배타적 인종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으로 읽혀 다행스럽다, 싶었다. 하지만 안도는 곧 한숨으로 바뀌었다. 8일 열여덟 살 때 올린 '한국 비하 글'이 뒤늦게 공개된 아이돌 그룹 2PM의 리더 재범(22)이 팀을 탈퇴하고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문제가 드러난 지 고작 나흘만이었다. 그가 공항에서 출국 '될' 때, 우리의 배타적 애국주의가 함께 '수출'되는 것 같은 기분이 문득, 들었다. 열등감은 보통 내성적일 것이라는 편견과 달..
이재훈의 IN&OUT no.3 비정규직법의 공식 명칭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다. '보호'한다,고 돼 있다. 법의 얼거리는 '2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이다. 2006년 11월30일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할 때, 노동계는 "2년이 되기 전 비정규직을 해고하면 막을 수단이 없다"고 반발했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 하종강 소장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맡았던 직책을 계속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보완돼야한다고 주장했었다"고 했다. 직책이 보존되면, 사측이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일이 손에 익은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래서 적어도 무차별 해고는 막을 수 있다는 대안적 논리였다. 경총 등 사측 단체는 침묵했다. 법도 꿈쩍하지 않았다. 지난해 말 논리는..
이재훈의 IN&OUT no.2 김문수 경기지사는 26일 황우석 박사의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협약을 맺었다. 김 지사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 생명공학연구는 계속돼야한다”고 말했다. 그보다 이틀 전, 황 박사는 검찰에 의해 논문조작과 연구비 횡령 혐의로 징역 4년을 구형받았다. 김 지사가 새삼 황 박사에게 무죄 추정 원칙을 적용한 걸까. 하지만 왠지 김 지사의 정치적 위치에 과학이, 그것도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과학이 종속적으로 ‘복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난해 인기를 끈 영화 ‘신기전’은 세종 시대 조선이 세계 최초의 로켓을 개발했다는 얘기다. 명나라가 조선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전쟁을 벌여 조선군이 신기전으로 명군을 격파하는 얘기를 담았다. 지정학적 위치 탓에 늘 강대국에 억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