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텍스트와 영화의 텍스트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 엄연히 다르다는 명제는 모두에게 강박적 규범이 될 순 없다. 텍스트의 크로스오버는 그래서 그 강박에 대한 해체 시도다. “영화가 당연히 이래야지”라는 말은, 그 말의 발화자가 영화를 보기 전 이미 그 영화가 가진 내러티브를 예상하고 봤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단순히 예측 가능한 텍스트로 자발적 마스터베이션을 유도하는 도구가 된다는 건 영화에 대한 모독 아닐까, 라고 정성일은 생각한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정성일의 첫 영화 는 그래선지, 영화 그 자체의 내러티브 기법보단 문학적 텍스트의 반복적 전달 기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도입부에서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이란 말로 명..
*스포일러 있음 우리는 상상력이 거세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아니 통제된 사회라고 해야 더 적확하겠다. 직업을 가진 이들은 매일 명확하게 정해진 시간이 되면 출근해야 한다. 이메일과 포털에 실린 연예뉴스를 살피다 눈치를 보며 업무를 시작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일제히 밥을 먹으러 간다. 유일하게 정해지지 않은 건 퇴근 시간밖에 없다. 일상에서 나를 해방시킬 퇴근 시간은, 이번에는 불명확성으로 내 삶을 옥죈다. 시간의 속박에 길들여진 삶은, 일상을 언제 마무리해야할 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면 아노미의 불안에 빠지고, 그로 인해 지친 몸과 마음은 어두운 그 어느 시간이 되면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지 못한 채 까무룩 마무리되고 만다. 그나마 정해진 일상의 시간이 있는 사람은 나은 편이다. 일상에 구속조차 될 수 없..
자정은 일상이 소멸하는 시간이다. 팽팽하게 긴장됐던 일상은 하루가 시작되는 자정에 이르는 순간 전날의 긴장을 접고 평온한 어둠으로 사라진다. 자정에 이르러 이성과 감성은 스며들 듯 교차한다. 자정은 하루의 죽음을 알리는 시간이다. 하루의 시작이 자정인 것처럼, 삶은 죽음에서 기원해 죽음으로 돌아간다. 자정부터 아침 7시는 일상에서 소외된 시간이기도 하다. 이 소외된 시공간에 깨어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은 일상성에서 벗어난 지점 어딘가에 위치해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잠들 수 없거나 혹은 잠들기를 거부하거나, 팍팍한 일상이 그들을 잠들 수 없도록 강요하는 건 마찬가지다. 자정부터 아침 7시까지의 시간은 그래서, 일상에서 유리되거나 소외된 자들의 것이다. 여기 이 소외된 시간에 소외된 자들에게 문을 여는 가게가 ..
*스포일러 조금 있음 그러고 보니 거기도 술자리였다. "자, 마시자~", "건배~"로 시끌벅적했다. 술상 건너편에 앉은 85학번 선배는 89학번 선배의 눈앞에 검붉은 얼굴을 디밀고 "씨발, 니가 대체 후배들을 위해 한 게 뭐야?"라고 소리쳤다. 89학번 선배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만큼 눈이 한 움큼 풀려있었다. 흐리멍덩한 눈동자에선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하지?'라는 의아함이 읽혔다. 디지털시계는 새벽 2시를 찍었다. 그 앞에선 86학번 선배가 "아 씨발, 형 좀 그만해. 젠장할, 20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냐"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래도 85학번 선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옆에 앉았던 92학번 선배는 86학번 선배의 허리춤을 감싸 안고 "형, 그러지 말고 앉아"라고 애걸했다. ..
*스포일러 많음 영화 를 본 이들은 주로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먼저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고들 했다. 에서 여성의 시각을 바탕으로 수컷의 욕망을 계보학적으로 밟아 올라갔던 박찬옥 감독이 7년 만에 나타나 형부와 처제의 금기된 사랑을 다룬다! 그것도 '탐나는 도다'에서 싱그러우면서도 섹시한 매력을 잔뜩 뿜어냈던 서우가 출연한다! 커다란 눈망울을 물끄러미 뜬 서우가 "이 사람 사랑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지 않는 듯 말하는 포스터까지! 영화가 극단적인 욕망의 소구점을 한껏 파고들어가 줄 줄 알았는데… "낚였다"며 허탈해 했다. 영화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는 안개처럼 그저 뿌옇다고도 했다. 인물 간의 감정 교차가 명확지 않았고, 오가는 대화조차 겹치지 않고 따로 논다는 푸념이었다. 영화평론가 남다은은 "를 치밀..
이재훈의 인앤아웃 no.10 길로 폰테코르보 감독의 영화 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쟁을 그리고 있다. 네이팜탄 폭격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이던 친인척을 잃어야했고 자기 삶의 터전에서 프랑스인들에게 "더러운 아랍놈"이란 말을 듣고 살아야했던 알제리인들은, 시대의 야만과 무너진 자존감에 대한 분노를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에 대한 지지로 해소한다. FNL은 저항의 첫 수단으로 테러를 선택한다. 이에 프랑스는 1957년 공수부대를 투입해 알제리인 거주지역을 게토로 만들고 무차별로 거주민을 검거한 뒤 고문이란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해 FNL 조직을 붕괴시킨다. 그러나 민중은 사라진 FNL의 저항정신을 잊지 않았다. 3년 뒤의 민중 봉기와 그에 따른 2년 뒤의 독립 쟁취는 그 저항정..
영화 ‘처음 만난 사람들’, 교감은 동정이 아니라 감정의 수위맞춤이다 *스포일러 조금 있음 우리는 대부분 착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아니, 다수의 편에 서길 원한다. 다수가 개인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행동을 함으로서 ‘착하다’는 소리를 듣길 갈망한다.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인정받는 이들의 무리는 늘 서로를 다독이고 개인을 ‘착한 사람’으로 형상화해간다. 반면 ‘나쁜 사람’은 늘 소수다. 나쁜 사람은 개별적 욕망에만 충실할 뿐이다. 다수의 인정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자기 주변에 밀착돼있는 소수에게만 인정받으면 그만이다. 때로는 그 주변마저 배척하고 극단적으로 홀로서기도 한다. 다수는, 그런 개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
관계가 진정성을 가질 때 언어는 한없이 무거워진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매일 아침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왼손은 턱에 괴고 오른손은 클릭질하는 자세로 심드렁하게 창을 연다. 정치뉴스엔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고 곧 신경줄을 놓는다. 대체로 분노할 힘도 없이 썩소만 짓게 되기 때문이다. 경제뉴스에선 잘 알지도 못하는 숫자 놀음에 수십조 원이 요동친다. 클릭하면 그저 스스로가 얼마나 비경제적인, 그래서 2009년 대한민국 사회에선 얼마나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동물로 규정되는지 확인하는 거울 같아 슬쩍 외면한다. 물론 냉소와 외면만 있는 건 아니다. 각종 연예 뉴스에 검지가 빠르게 경련하기도 한다. 이런 뉴스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들의 클릭질을 ‘낚기만’ 원할 뿐이야, 혹은 ‘…’로 끝맺..
*스포일러 조금 있음 한국의 여자는 늘 엄마였다. 그저 여자로서 여자일 순 없었다. 남자는, 아니 아빠는 늘 외출 중이었다. 아빠들은 시대의 부름을 받고 독립투사 혹은 일제 부역꾼이 됐다. 이념 싸움에 휩쓸려 초록 군복을 입거나 빨갱이로 몰려 산으로 도망갔다. 개발 독재의 명령 아래 산업 역군이 되거나 민주화 투사로 감옥에 갔다. 늘 아빠는 제 자리에 없었고, 엄마가 그 자리를 채웠다. 국가를 되찾아오자는 외침이든, 국가를 건설하자는 선포든,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구호든, 그에 상응하는 선언적 집단 동원 체제의 억압 공포를 맛본 1차 희생양은 아빠였고, 간접 체험한 사람은 엄마였다. 비단 역사 흐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근대성이 개인을 파고들면서부터 그랬다. 국가주의는 엄마의 이름에서 여자를 앗아갔다. 여..
몽골인들은 분만실을 만들 때 빛을 차단한다. 아기가 어둠 속 엄마 자궁에서 나와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빛이 너무 강렬하면, 인생의 수만 분의 1도 채 살지 않은 상태에서 시력의 절반 이상을 잃는다고 그들은 믿는다. 이후에도 몽골의 아기들은 천막 안에서 점진적으로 어둠으로부터 밝음에 적응해가는 연습을 한다. 탁 트인 초원에서 늘 장거리 포커스로 망막의 렌즈를 맞추며 살아야하는 몽골인은, 그래서 2.0 정도는 우스울 정도의 평균 시력을 가졌다고 한다. 세상과 접목하는 순간,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의 강렬한 빛을 보며 태어나는 우리네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상대적으로 폭력적인 환경에 놓여있는 셈이다. 도덕을 체험하게 되는 우리의 규범 감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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