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조금 있음 한국의 여자는 늘 엄마였다. 그저 여자로서 여자일 순 없었다. 남자는, 아니 아빠는 늘 외출 중이었다. 아빠들은 시대의 부름을 받고 독립투사 혹은 일제 부역꾼이 됐다. 이념 싸움에 휩쓸려 초록 군복을 입거나 빨갱이로 몰려 산으로 도망갔다. 개발 독재의 명령 아래 산업 역군이 되거나 민주화 투사로 감옥에 갔다. 늘 아빠는 제 자리에 없었고, 엄마가 그 자리를 채웠다. 국가를 되찾아오자는 외침이든, 국가를 건설하자는 선포든,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구호든, 그에 상응하는 선언적 집단 동원 체제의 억압 공포를 맛본 1차 희생양은 아빠였고, 간접 체험한 사람은 엄마였다. 비단 역사 흐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근대성이 개인을 파고들면서부터 그랬다. 국가주의는 엄마의 이름에서 여자를 앗아갔다. 여..
몽골인들은 분만실을 만들 때 빛을 차단한다. 아기가 어둠 속 엄마 자궁에서 나와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빛이 너무 강렬하면, 인생의 수만 분의 1도 채 살지 않은 상태에서 시력의 절반 이상을 잃는다고 그들은 믿는다. 이후에도 몽골의 아기들은 천막 안에서 점진적으로 어둠으로부터 밝음에 적응해가는 연습을 한다. 탁 트인 초원에서 늘 장거리 포커스로 망막의 렌즈를 맞추며 살아야하는 몽골인은, 그래서 2.0 정도는 우스울 정도의 평균 시력을 가졌다고 한다. 세상과 접목하는 순간,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의 강렬한 빛을 보며 태어나는 우리네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상대적으로 폭력적인 환경에 놓여있는 셈이다. 도덕을 체험하게 되는 우리의 규범 감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다음..
*스포일러 있음 수컷의 관계맺음은 지배 혹은 굴종의 아비투스로 점철된다. 원시의 정글에서 수컷은 먹이 사냥에 더해 다른 수컷으로부터 사냥한 먹이를 빼앗거나 지킬 궁리도 해야 했다. 이때 수컷은 먼저 온전히 근육의 부딪힘으로 우위를 겨룬다. 힘이 센 수컷은 당연히 약자의 사냥감을 빼앗지만, 그렇다고 모두 빼앗진 않는다. 약자가 굶어 죽으면 결국 강자가 누릴 사냥감의 절대량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틈을 이용해 약자인 수컷은 나름의 처절한 생존법을 배운다. 강자에게 “받들어총!”으로 굴종하면, 승산이 없는 힘겨루기를 했을 때보다 더 많은 비율의 먹이를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수컷들은 생태계의 먹이사슬 마냥 지배 또는 굴종했다. 현대의 수컷들도 진화하지 않았다. 게다가 근대의 가..
‘잘했군 잘했어’ 정애리를 통해 본 집착의 모성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해석된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욕망하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너, 인간관계에서 체득했다는 걸 의미한다. 즉 나는 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면 해석될 의미가 없다. 아니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유태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와 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 방식을 고려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러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여기 ..
아이들이 희희덕거린다. 모르는 아이들이 비웃는 건 꾹 참으면 된다. 하지만 매일 집에 같이 가는 ‘영희’가 나를 외면한 채, 반 아이들과 함께 웃는 모습은 견디기 힘들다. 배신감이 든다. 교탁 앞에서 엄마 대신 일일교사로 온 이모가 온갖 천을 덧댄 우스꽝스런 옷을 입고, 남들보다 굵은 특유의 목소리로 내 친구들에게 친한 척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보편적인 모양새의 엄마나 이모를 원할 뿐, 독특함과 특별함, 그리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다들 어리니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보단,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데 급급한 그저 아이들일 뿐이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과, 아니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과 다르다손 싶으면, 집단에 기댄 채 그 다른 존재를 비웃고..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아기다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할머니와 둘이 산다. 할머니는 대화의 상대라기 보단 의식주의 의존대상일 뿐이다. 주로 게임을 하고 공포물을 보며 불에 타 죽는 꿈을 꾼다고 했다. 게임, 즉 가상의 공간은 그가 유일하게 자신감을 갖고 타인과 소통하는 창이다. 공포물은 관계 맺기에 미숙한 그가 꿈꾸는 상상 속 인간관계의 틀이다. 삶에서 우리는 늘 주변인들로부터 긍정적인 면은 인정을 받고 부정적인 면은 자극을 받으며 진로를 조정해나간다. 하지만 그는 실재적인 관계를 맺는데 서툴다. 친구가 없다. 공포물은 그런 그가 관계를 맘대로 조종하고 통제하며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전기톱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영화 장면을 반복적으로 반추하며 떠올리는 그의 상상은, 흉..
그는 소리없이 오열했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물이었다. 따뜻한 봄볕조차 미치지 않는 차가운 땅 속으로, 삼베천으로 꽁꽁 싸인 그의 어머니가 무명천을 지지대 삼아 천천히 들렸다가 조금씩 내려졌다. 몸 크기에 맞게 파낸 줄 알았던 홈이 작아 몸이 다시 들렸다. 인척들은 혀를 차며 인부들을 나무랐다. 손에 박인 굳은살보다 더 무뚝뚝하던 인부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변하며 연방 "죄송합니다"를 되뇐다. 아래쪽을 삽으로 더 파내고서야 인척들의 표정이 풀린다. 횟가루가 섞인 차가운 흙이 그 위에 흩뿌려졌다. 160cm가 채 될 것 같지 않은 몸은 그렇게 부분 부분 세상과 이별했다. 관 뚜껑을 5등분한 듯한 나무판자가 홈 안에 몸을 봉인했다. 사고로만 남아있던 죽음이 땅밑으로 내려가는 순간 몸으로 느껴..
역사란 늘 해석하는 자의 몫이다. 진실과 사실 사이에 늘 이견이 존재하듯 역사의 해석에도 다른 견해가 분분하다. 하지만 후한 말 중국을 소재로한 삼국지(三國志)만큼 이견이 적은 역사 해석이 존재할까. 대부분의 평역 삼국지에서 인물 각색은 비슷한 구도를 보인다. 유비는 우유부단하지만 너그러운 덕치주의자 이미지, 손권은 공격보단 수비적인 자세로 일관했던 수성주의자 이미지, 조조는 교활하고 잔인한 간웅의 이미지로 고착화됐다. 아마 정사 삼국지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가진 영향력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문열이 삼국지에서 평했듯 “모든 것을 다 할 줄 아는 만능의 치자보단, 모든 것을 다 할 줄 아는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인치(人治)의 치자가 더 사랑받는 대중의 지지”도 한몫했을 것이다. 때문에..
지하철 1호선을 탔습니다.청량리역에섭니다.1호선을 탄 건 거의 2년만이었습니다.동대문구 이문동에서 마포쪽으로 이사간 게 그 즈음이었거든요.하지만 1호선은 전혀 변하지 않았더군요.팍팍한 삶이 묻어있는,남에게 보여주기위해 멋을 부린 게 아니라,그저 추위를 이겨내기위해 단단히 동여입은 옷차림의 우리네 서민들 모습은 정겹기 그지 없었습니다. 좌석에 여고생인 듯한 10대 3명이 나란히 앉아있습니다.3명 모두 짧게 쳐올린 커트 머리에 앞머리는 직접 자른 듯한 가지런한 일자 머리를 한 걸 보니 요즘 그들에게 유행하는 머리인 듯 했습니다.개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꺄르르 웃는다는 그들에게 흥밋거리가 생겼습니다.노숙자 행색을 한,6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다가온 겁니다.입가엔 음식 자국이 묻어있고 옷은 한 두어달 빨지 않..
인터넷에 온갖 글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개중엔 남을 설득하기위해 지난하게 노력하는 글이 있는 반면,그런 노력보단 자신의 주장이 가진 당위성만 강조하는 ‘스트레스 해소성’ 글도 많은 것 같습니다. 최근 다음 블로그에서 화제가 된 글이 있었습니다.‘어느 연구사의 아내’라는 제목으로 농촌진흥청(농진청) 연구사 아내가 쓴 글이 누리꾼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일으켜 20만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누군지 궁금증이 일어 수소문 끝에 대구에 사는 박미숙(38)씨와 전화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박씨는 농진청 대구사과연구소 재배실에서 14년동안 일해온 6급 연구사(44)의 아내였습니다. 처음엔 인터뷰를 내내 조심스러워 했습니다.그냥 답답한 마음에 블로그에 글을 올린 것 뿐인데,아무 것도 모르는 당신이 괜히 아는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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