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인앤아웃 no.8 1996 비아르 舊 자이르 photo by 성남훈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은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결같이 참담하고 먹먹하다고 했다. 쭈뼛거리며 책을 들었더니, 그 반응은 슬몃 이해가 되면서도 언뜻 표상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엔 병자호란 때의 처절했던 역사가 담담하지만 숨막히는 문체로 서술돼 있었다. 국제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설 속 개인들은 국가가 요구하는 당위에 얽매이지 않았다. 무너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개인이 희생돼야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김훈은 강요하지 않았다. 개인은 철저히 생존 본능에만 충실했다. 그 ‘속물적’ 선택들은 우리에게 내 속의 본능을 날 것 그대로 쳐다봐야하는 불편함을 안겼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국가가 요구하는 당위에 길들여진 것이란 사실을 문득..
이재훈의 인앤아웃 no.7 아이는 말을 잃었다. 바싹 마른 입술은 이따금 불안하게 달싹이며 뭔가 말을 만들어내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소리로 맺히는 일은 없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혹시 설명해도, 그게 사실이라고 증명할 방도가 없다. 눈동자는 깊이를 잃은 채 마치 흐린 유리창 같다. 들여다봐도 안쪽이 잘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어디에도 초점이 맺혀 있지 않다. 바라보는 것은 가상의 한 점에 지나지 않았다. 질문에 반응하는 아이의 고갯짓은 행동반경이 고작 1㎝도 되지 않았다. 깜빡 놓쳐버릴만큼 작은 움직임이었다. 아이는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남은 빈 허물처럼 보인다. 성인에게 수없이 반복적으로 강간당했다. 자궁 내부에도 상처가 있고, 난자의..
이재훈의 인앤아웃 no.6 2009년 현재 온갖 미디어는 '서민'을 호명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정부 정책 발표에도, 뉴스에도 서민은 족족 등장한다. 어느덧 우리도 서민이란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리곤 한다. 언론재단 기사 검색에서 서민이란 단어를 찾아봤다. 종합일간지에서 2008년 한 해 동안 '서민'은 모두 1만183번 쓰였다.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5338건보다 1.9배, 10년 전인 1998년 2184건보다 4.7배 늘었다. 우리를 서민으로 불러주는 정치인과 공무원, 언론인이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왜 그럴까. 서민은 왕조 시대 단어다. 아무 벼슬을 갖지 못한 사람, 즉 평민이란 의미였다. 왕족 이하 특권층인 양반, 그리고 평민과 천민 등 신분계급이 명확한 시대였다. 당연히 서민은 정치적으로나 ..
이재훈의 인앤아웃 no.5 녀석은 늘 웃음이었다. 독실한 신자로 술을 삼가는 녀석은, 모임마다 끝까지 남아 독주의 고통에 허덕이는 선후배를 챙겼다. 이사를 도우러가면 목장갑을 낀 녀석이 늘 한쪽에서 끙끙대며 짐을 옮기고 있었다. "넌 좀 그만 와도 돼"라고 핀잔주면, 씩 웃고 말았다. 4수로 뒤늦게 4년제 대학 3학년이 된 후배 효준(28)이는 그러던 어느 날부터, 모임에도 이사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 녀석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묻어나지 않았다. "보습학원 비정규 강사로 일해요"라고 했다. 처음 넉 달은 80만원, 이젠 100만원 받는다. 오후 3시부터 자정까지 꼬박 수업한 대가다. 때문에 녀석은 대학 강의를 오전에 몰아서 듣는다. 4.2점을 웃돌던 학점은 3점을 겨우 넘긴다. 밥값과 교통비로..
이재훈의 인앤아웃 no.4 잠시 웬일인가 했지만, 역시 그뿐이었다. 6일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28)씨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한국인이 모욕죄로 처음 기소됐다. 제도가 누군가를 처벌하는 일이 그다지 기뻐할 일만은 아님에도, 그날의 기소문은 우리 안에 깊숙이 박힌 순혈주의와 배타적 인종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으로 읽혀 다행스럽다, 싶었다. 하지만 안도는 곧 한숨으로 바뀌었다. 8일 열여덟 살 때 올린 '한국 비하 글'이 뒤늦게 공개된 아이돌 그룹 2PM의 리더 재범(22)이 팀을 탈퇴하고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문제가 드러난 지 고작 나흘만이었다. 그가 공항에서 출국 '될' 때, 우리의 배타적 애국주의가 함께 '수출'되는 것 같은 기분이 문득, 들었다. 열등감은 보통 내성적일 것이라는 편견과 달..
이재훈의 IN&OUT no.3 비정규직법의 공식 명칭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다. '보호'한다,고 돼 있다. 법의 얼거리는 '2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이다. 2006년 11월30일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할 때, 노동계는 "2년이 되기 전 비정규직을 해고하면 막을 수단이 없다"고 반발했다. 한울노동문제연구소 하종강 소장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맡았던 직책을 계속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보완돼야한다고 주장했었다"고 했다. 직책이 보존되면, 사측이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일이 손에 익은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래서 적어도 무차별 해고는 막을 수 있다는 대안적 논리였다. 경총 등 사측 단체는 침묵했다. 법도 꿈쩍하지 않았다. 지난해 말 논리는..
이재훈의 IN&OUT no.2 김문수 경기지사는 26일 황우석 박사의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협약을 맺었다. 김 지사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 생명공학연구는 계속돼야한다”고 말했다. 그보다 이틀 전, 황 박사는 검찰에 의해 논문조작과 연구비 횡령 혐의로 징역 4년을 구형받았다. 김 지사가 새삼 황 박사에게 무죄 추정 원칙을 적용한 걸까. 하지만 왠지 김 지사의 정치적 위치에 과학이, 그것도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과학이 종속적으로 ‘복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난해 인기를 끈 영화 ‘신기전’은 세종 시대 조선이 세계 최초의 로켓을 개발했다는 얘기다. 명나라가 조선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전쟁을 벌여 조선군이 신기전으로 명군을 격파하는 얘기를 담았다. 지정학적 위치 탓에 늘 강대국에 억눌..
혜원이는 초록 풍선을 거머쥔 손을 꼬물거렸다. 세상에 난 지 28개월됐다. 막 ‘아빠’란 말을 조그만 입으로 오물거릴 때다. 하지만 아이는 “아빠, 보고 싶어”라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20여 일째 아빠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철조망과 폐 트레일러로 가로막힌 공장 밖에서 풍선을 띄웠다. 아빠는 하늘을 볼 여유가 있었을까. 그 시각 아빠 박일규(40)씨는 온갖 살인무기가 오가는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 현장에 서 있었다. “전기가 끊겨 충전이 어려운지 짧게 통화했어요. 위험하니 아기 데리고 집에 가라더군요. 더 위험하면서…” 엄마 김향금(27)씨는 메마른 날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무도 그를 달랠 수 없었다. 악다구니가 벌어졌다. 사측 직원들과 진압을 위해 고용한 용역들이 ‘정상조업’이라 적힌 주홍 완장을 차고 ..
영화 ‘처음 만난 사람들’, 교감은 동정이 아니라 감정의 수위맞춤이다 *스포일러 조금 있음 우리는 대부분 착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아니, 다수의 편에 서길 원한다. 다수가 개인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행동을 함으로서 ‘착하다’는 소리를 듣길 갈망한다.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인정받는 이들의 무리는 늘 서로를 다독이고 개인을 ‘착한 사람’으로 형상화해간다. 반면 ‘나쁜 사람’은 늘 소수다. 나쁜 사람은 개별적 욕망에만 충실할 뿐이다. 다수의 인정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자기 주변에 밀착돼있는 소수에게만 인정받으면 그만이다. 때로는 그 주변마저 배척하고 극단적으로 홀로서기도 한다. 다수는, 그런 개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
관계가 진정성을 가질 때 언어는 한없이 무거워진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매일 아침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왼손은 턱에 괴고 오른손은 클릭질하는 자세로 심드렁하게 창을 연다. 정치뉴스엔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고 곧 신경줄을 놓는다. 대체로 분노할 힘도 없이 썩소만 짓게 되기 때문이다. 경제뉴스에선 잘 알지도 못하는 숫자 놀음에 수십조 원이 요동친다. 클릭하면 그저 스스로가 얼마나 비경제적인, 그래서 2009년 대한민국 사회에선 얼마나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동물로 규정되는지 확인하는 거울 같아 슬쩍 외면한다. 물론 냉소와 외면만 있는 건 아니다. 각종 연예 뉴스에 검지가 빠르게 경련하기도 한다. 이런 뉴스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들의 클릭질을 ‘낚기만’ 원할 뿐이야, 혹은 ‘…’로 끝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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