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생활 초기에 포이동 판자촌 주민들을 취재하다 만난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벌써 7년 전이다. 그는 자주 입버릇처럼 내뱉는 문장이 있다. 뭔가 머쓱해질 때 혹은 자신이 충분히 알고 있는 사안이지만 뭔가 말하기가 부끄러울 때, 그는 먼저 “형이 배운 게 있냐, 할 줄 아는 게 있냐”라는 말을 건네며 머쓱함과 부끄러움을 견제한다. 그는 10여년 동안 철거촌과 판자촌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설득해 개발주의 공권력, 그리고 개발주의 공권력과 결탁한 건설 자본과의 싸움을 독려해 왔다. 그가 처음부터 철거촌 주민 생존 투쟁에 대해 대단한 정치 의식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한 보험회사에서 상무의 운전사로 일하던 그는, 1997년 IMF 구제금융 때 사실상 정리해고라고 볼 수 있는 자진사퇴를 했다. "당시에 운전팀..
지난 11일 경기 평택시 군문동 평택장례문화원 특 3호. 검은 소복을 입은 김정희씨는 아들 김철강(35)씨의 영정 앞에서 입술을 거의 열지 않은 채 몇 마디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메마른 입에서 조금씩 밖으로 세어나오는 그의 말은 드문드문 들렸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고 싶은 거 다 해주면서 왕자처럼 키웠는데…. 해주고 싶은 게 더 많았는데 저렇게 한순간에…. 내가...” 빈소 밖에서 김철강씨를 추모하기 위해 기다리던 조문객들은 차마 그런 김정희씨를 말리지 못했다. 어머니 외엔 가족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상주 자리에 앉은 김철강씨의 이종 사촌도 그런 김정희씨를 건드리지 못했다. 아무도 김정희씨의 긴 조사에 개입할 수 없었다. 하루 전인 10일 오후 3시께 경기 평택시 비전1동 ㅈ아파트. 김정희씨는 식..
공저이긴 하지만 내 생애 첫 책이 세상에 나왔다. 주제는 안철수이고, 나는 2번째 장에서 안철수의 메시지를 분석하는 역할을 맡았다. 제목은 . 4대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를 하고 있다고 한다. 부끄럽지만, 안철수를 바라보는 대중에 속해 있었거나 혹은 한 발짝 떨어져 있길 원했던 당신이라면 한 번 이 책을 읽어보고 이 공간에서 함께 토론을 해봤으면 좋겠다. 이하는 청년 정치평론가인 한윤형이 쓴 책의 서문이다. ‘안철수, 대통령? 대통령, 안철수?’ 출판사로부터 안철수를 소재로 책을 쓰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그렇다면 안철수가 정치권에 입문하지 않더라도 의미가 있는 책을 쓰고 싶다.”고 어필했다. ‘안철수’란 이름 뒤에 ‘대통령’이란 단어를 붙여보자는 제의는 그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자유롭기 위해선, 모든 관계를 단절한 채 지낼 수 밖에 없다. 관계에 개입하는 이상, 나의 완벽한 자유는 타자로부터 틈입을 당해 나와 타자의 간극 속으로 유리된다. 자폐적 개인이 되지 않는 이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목소리를 곤두세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때론 나의 것이지만, 때론 타자의 것이기도 하고, 때론 나와 타자의 것이 뒤섞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철저히 개별적인 1대1 관계에서 나는 가끔 타자를 배제하고 나만을 위한 목소리를 내려는 나를 발견하고, 움찔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한참을 웅크리고 있다가, 나만을 위한 목소리를 내려는 나의 욕망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을 때 다시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선다. 그런 나를 보는 1대1 관계에..
교육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를 자각하는 주체적 행위다. 공동체 공간에서 이뤄지는 타자와의 만남은 수많은 ‘너’의 존재를 통해 ‘나’라는 개별적 존재가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지에 대해 인식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그래서 교육은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흔히 교육의 주체를 학생과 학부모, 교사라고 얘기할 때, 한국에선 학부모와 교사는 교육을 ‘하는’ 존재, 학생은 교육을 ‘받는’ 존재라고 인식한다. 교육이 가진 본연의 의미가 배제된 선입견이라 할 수 있겠다. 학생이 다른 학생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주체성을 자각해갈 때, 학부모와 교사는 관계와 인식의 장을 열어주는 객체로 존재해야 하지만, 한국의 학부모와 다수의 교사는 스스로 학생들을 타자화하고 자신..
‘반값 등록금’ 실현을 요구하는 주된 목소리는 보편성에 대한 요구였다. 지난 6월 10일 2만여 명이 모인 서울 청계광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들린 구호는 “조건 없는 반값 등록금 실현하라”였다. ‘조건 없는’이란 관형어에는 “누구나 ‘미친 등록금’에 대한 부담 없이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허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보다 나흘 전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광장에서 “우선 소득 하위 50%까지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자”고 발언했다가, 대학생들의 야유를 듣고 하루 만에 “전계층 실시”로 방향을 바꿔야 했다. 보편성에 대한 요구와 그 요구의 즉자적 수용은 그 한계가 분명함에도, 다수 언론에 의해 ‘좌 클릭’이라는 수사로 포장됐다. ‘보편적 접근성’ 요구는 일단 정당 연간 비용 1천만 원을 넘나드는 등록금, ..
'반값 등록금'은 사실 하나의 상징이다.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이미 죽어있는 한국의 고등교육에 대해 다시 한 번 '한국 대학교육은 죽었다'라고 선포하는 행위의 시작점이다. 그에 대한 고민을 좀 더 대중적인 시각으로 에 풀어간 기획 시리즈 URL을 여기 한 곳에 모아 놓는다. 시리즈는 모두 6회로 이뤄져 있다. 1) 정부 지원 늘려 '반값 등록금' 메인/'반값 등록금' 먼저 '고등교육재정교부금+등록금 액수 상한제+소득수준별 차등 등록금' 패키지로 풀자 보조1/ '반값 등록금'은 세금 낭비인가? 보조2/ 패키지안 배경은? 2) '사립대 독과점' 공공 통제로 깨라 메인/'사립대 독과점' 민주적 공공 통제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 보조1/'반값 등록금' 요구 심상치않자 장학금 찔끔 올린 사립대 보조..
‘반값 등록금’은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등록금 총액 14조원(2009년)에서 대학과 정부가 지급하는 장학금 2~3조원을 뺀 나머지 금액의 절반인 6~7조원의 재원으로 ‘반값 등록금’을 실현해도, 대학이 계속 등록금을 올리면 국민 세금으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만 반복된다. 학벌·학력 중심 채용이 엄존하는 한 고등학교 졸업생의 79%(2010년)가 대학에 가는 ‘비정상’적인 수요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반값 등록금’ 촉구는 ‘등록금을 깎으라’는 목소리를 넘어 대학 교육의 공공화에 대한 요구를 함께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1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반값 등록금’ 촉구 촛불집회에서도 “반값등록금 실현하라”라는 구호만큼이나 “사립대를 국유화하라”, “국공립대 법인화 철폐하라”, “무상교육 실..
1980년대 민주화 열풍으로 쫓겨난 사립대 비리 재단의 복귀 노림수에 ‘흔한 비리’ 면죄부로 담합하는 사학분쟁조정위 한국은 숭고한 교육 사업가들의 나라다. 2010년 기준으로 한국의 4년제 대학 179곳 가운데 사립대는 152곳으로 전체의 84.9%에 이른다. 국립대는 25곳, 공립대는 2곳밖에 안 된다. 사립대 비율이 유례없이 높다. 교육 현장에 공공의 자본보다 개인의 자본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 학교 법인은 유력한 ‘재산 도피처’다. 태생부터 그랬다. 해방 이후 농지개혁을 하던 와중에 정부는 교육환경을 조성하려고 대지주들에게 토지를 학교재단으로 등록하면 농지개혁 대상에서 빼주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땅을 잃을까 두려워하던 대지주들은 앞다퉈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오래 불지 못한 교육 민주화 바람 개인의 ..
경쟁은 이미 일상으로 내면화돼 있었다. 학교가 경쟁을 강요하며 공부 잘하는 학생만 떠받들고 있지만, 학생은 그런 학교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상위권에 들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지난 3일 서울의 ㄱ고등학교 앞에서 만난 이 학교 3학년 정성모(가명·18)군은 “아이들끼리 1등부터 50등은 ‘알짜배기’, 51등부터 100등은 ‘예비인력’, 100등 밖은 ‘잉여’라고 부른다”며 “학교가 결국 100명만 끌고 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만연해 있다”고 했다. 이 학교는 학년별로 1등부터 50등까지 성적순으로 독서실 지정석을 만들어 두고, 그들과 51~100등 사이에는 칸막이를 설치해 학생들을 갈라놓았다. 1등부터 10등까지 최상위 학생들이 앉는 책상은 다른 학생들의 책상보다 더 넓고, 사물함도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