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영희 선생은 휠체어에 몸을 싣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담요가 올려져 있었고, 말을 하는 입술은 한쪽의 입꼬리가 다른 쪽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균형이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파주까지 찾아와, 막 ‘기자’라는 호명을 안고 연수를 받으러 온 후배들 앞에서 ‘쓰는 자’의 책무에 대해 조곤조곤 역설했다. 이른 함박눈이 거세게 쏟아진 2003년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선생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의 일례로 서해북방한계선(NLL)을 거론했다. “남북한 사이에 영토와 군사분계선에 대한 협정은 1953년 정전협정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뿐입니다. 두 문서에선 오로지 쌍방이 인정한 영토와 군사분계선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전협정에는 군사분계선을 연장할 수 ..
최근 방송이 끝난 드라마 '동이'에서 대중에 가장 많이 회자된 인물은 '동이' 역을 맡은 한효주도, '숙종' 역을 맡은 지진희도 아니었다. 단역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보조 출연자로 드라마에 등장해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연기 아닌 연기를 한 '티벳궁녀' 최나경이 의외의 인기를 끌며 '미친 존재감'이란 조어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최나경의 연기는 역설이기에 눈길을 끌었던 것 같다. 최고상궁 역을 맡은 임성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연기력을 한껏 발산할 때, 최나경이 한 연기라곤 전혀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임성민을 물끄러미 바라본 것뿐이었다. 하지만 대중은 그 무표정의 '발연기'에 열광했다. 역설은 일반의 인식을 뒤집은 것에서 비롯됐다. 일반적 인식대로라면, 보조 출연자는 어떤 식으로든 과잉된 연기를..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12년째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김아무개(38) 교사는 5일 와 만나자마자 불쑥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모의고사 도중 한 교실에서 엎드려 자는 절반의 학생들, 한 개 번호로 쭉 내려 찍은 답안지, 학교에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학생들이 쓰러뜨린 화분과 쓰레기통, 욕설 섞인 낙서가 사진에 담겨 있었다. 그는 “10년 전과 달리 요즘엔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모여 축구나 농구를 하는 학생들을 찾아볼 수 없다. 또래 문화가 사라진 학교는 그야말로 서열화한 대학 가운데 어떤 곳을 갈지 경쟁하는 학원이 되었고, 학생들은 더 이상 대학 이후에 뭘 하고파 하는지 꿈을 얘기하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와 대학이 가파르게 입시기관과 취업사관학교가 되고 있다. 학교..
초등학교 시절 학교가 갑자기 난리법석을 치를 때가 있었다. 커터 칼로 왁스를 긁어내 흩어놓은 뒤 헝겊으로 목재 마루를 닦고, 화장실은 호스로 물을 뿌려 머리카락 한 올까지 하수구로 보낸 뒤 물기를 모두 닦아냈다. 교문에서 학교 건물까지 늘어선 화분의 오와 열을 맞추고, 운동장에는 과자 봉지의 조각 비닐까지 모두 주워담았다. 창문은 물로 깨끗이 닦고 신문지를 구겼다 편 뒤 남은 물기를 닦아냈다. 선생은 평소 문제아로 낙인찍어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길 때까지 매질을 해대던 아이에게 갑자기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나흘 청소를 하고 '문제아'를 대하는 선생의 태도가 남다를라 치면, 며칠 뒤 어김없이 교육청에서 장학사가 찾아왔다. 장학사는 잔뜩 고개를 치켜들고 교문에 들어섰고,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언사..
예전에 써놓은 글을 참고하기 위해 뒤지다, 2005년 3월에 쓴 글을 발견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하고 있을까... 치밀어오르는 분노나 표출할 수없는 답답함으로 폭발하기 직전일 때 우리는 종종 높은 곳을 찾곤 한다. 확 트인 곳에 올라가면 저 아래 삶의 현장을 잠시나마 하찮게 볼 수 있는 높이의 힘 탓에 가끔 분노나 답답함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의 활로를 찾을 때 땀흘리며 산을 오르고, 드라마에서는 답답한 사람들마다 빌딩 옥상을 찾아가는 모습이 대명사처럼 묘사되는 건지 모르겠다. 2005년 3월21일 오전 7시30분 서울 서대문네거리 도심 한복판. 평소 그 자리에 있는 지도 몰랐던 21m 높이의 교통관제센터에 3명의 젊은 여성들이 올라섰다. 안전장구 하나없이, 1∼2m 간..
아무 것도 모르던 대학 시절과 어설픈 초년 기자 시절, 나는 수많은 ‘허기사’를 만나, 뭘 할 수 없음에 좌절했다. 뭘 할 수 없음에도 살갑게 대하는 것만으로 체면치레를 하려하는 나 자신의 비루함에 화가 나고, 그 와중에 한 것도 없으면서 뭔가 대단한 걸 한 듯 의기양양한 선배들이 꼴사납고, 그런 선배들에게 욕지거리 한 번 내뱉지 못한 나의 소심함에 욕이 나왔다. ‘이상한 모자’의 홈페이지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에서 개인적으로 ‘쩜셋(정확히는 ... 이다)’에게 바치는 글을 훔쳐보다, ‘아 씨발’ 욕이 불쑥 튀어나왔던 건 그래서였다. 그의 홈피가 원인을 알 수 없는(아마 그는 아는 듯 하지만) 버그에 걸려 잘 열리지 않는 바람에, 나의 블로그에 처음으로 남의 글을 퍼온다. .................
남북의 분단은 역시나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등장할 때마다 많은 이슈들을 초토화하고, 오로지 그 논란에만 눈길을 집중시킨다. 이번에는 북한의 3대 세습체제 구축에 대한 비판 여부를 두고 '진보 진영'이 둘로 갈려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휴전선 위에 있는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말들의 성찬이 당면한 주변 민중의 삶과는 상당 부분 괴리돼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말들의 성찬이 한쪽의 비상식적인 신실성과 다른 쪽이 그에 대해 내뱉는 '극도의 부정' 혹은 비아냥으로 점철돼 있다는 점에서 논쟁은 상당히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도착적 언어와 배제적 언어만 난무할 뿐, 이 논쟁이 도대체 왜 이렇게 뜨거운 감자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회의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다지'라고 단서를 단 건..
재방송을 봤다는 건 프로그램이 끝나고서야 알았다. '슈퍼스타K2'에서 134만여 명의 지원자 가운데 톱11을 선정했다. 10명은 이미 정해졌고, 현승희와 강승윤이 마지막 한 자리를 두고 맘을 졸였다. 엄혹하게도, 성공으로의 탑승과 내처짐의 갈림은 문자메시지로 통보됐다. 강승윤은 탑승했고, 현승희는 짐을 쌌다. 심사위원 넷이 둘을 심사하는 과정이 뒤이어 방송됐다. 이승철과 박진영은 현승희의 '뛰어난 가창력으로 대변되는 천재성'을 높이 샀고, 윤종신과 엄정화는 강승윤의 '자신감과 심사위원 지적에 맞춰 변하려는 의지'를 장점으로 꼽았다. 결국 후자가 선택됐다. 재방송인지도 모를 정도로 '슈퍼스타K2'를 챙겨보지 않은 채로는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지만, 나는 결국 이 한 장면에서 '슈퍼스타K2'의 한계가 고스란히..
장관인 아버지를 '스펙'으로 썼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행동으로 과시하던 35세의 한 여성이 아버지와 손을 잡고 나란히 백수가 됐다. 며칠 동안 신문과 방송은 이 부녀에게 칼을 씌운 채 칼춤을 췄다. '현대판 음서제도의 부활'이라는 거창한 수사까지 등장시키며 장관 부녀를 그 부활의 상징으로 규정한 채 한껏 매질했다. '다수 대중'은 장관의 낙마 이후까지 온통 부녀의 '공정치 못함'을 술안주로 삼았고, '공정한 사회'를 내걸었던 대통령은 사실상 폐지로 가던 고시 제도를 부랴부랴 무덤에서 꺼내놓으며 급한 불을 끄려 애썼다. '다수 대중'은 백수가 된 부녀를 비난하며 '그래도 대한민국은 건강하다'는 명제 아닌 명제를 '재확인'하려 했고, 대학 입시에서의 입학사정관제 도입과 같이 전형 과정을 불투명하게 하며 '특권..
근래 며칠 동안 한국 사회는 스펙터클로 전시된 장황한 정치 쇼에 의해 요동치고 있다. "죄송합니다"란 사과만 연발해 '죄송 내각'이란 달갑지 않은 호칭을 듣게 된 이들 가운데 29일 결국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와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했다. 인사청문회에서 이들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민주당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일방적 밀어붙이기'로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며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의 사퇴 요청을 일단 유보했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조 후보자의 경우엔 도덕성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조 후보자가 위장전입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 관계에 대해선 여기서 그냥 한 번 웃고 넘어가 주자- 여기까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