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밋밋한 지루함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가슴을 헤집는 감동의 목소리는 대중의 귀에 다가가는 첫 순간에만 효과적일 뿐이다. 감동도 반복적으로 강요되면 금세 외면당하고 만다. 평소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기 어려웠던 가수들의 ‘환상적인 목소리’는 사실 도구일 뿐이다. 정작 프로그램이 눈길을 줘야 할 건 누구나 ‘원칙’에 따라 탈락할 수도 있는 ‘공정한 사회’, 그 냉정한 현실 법칙의 판타지화이다. 쟁쟁한 가수들을 서바이벌 게임의 정글로 내몰고, 그들의 환호와 좌절을 컨트롤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라고 말하는 프로그램. 나는 손에 땀을 쥔 채 가수들을 정글로 내모는 주체가 된 양 화면에 몰입한다. 정글 같은 현실에서 허덕이던 나는 여기서, 정글을 컨트롤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판타지에 빠진 채 현실의 ..
*쌍용자동차 투쟁 다큐 영화에 대한 두 번째 보고서 지난 22일 1년 만에 다시 만난 신동기(34)씨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에게 물었다. “요즘 정육점 일은 어떠신가요?” 하지만 그는 쓰게 웃으며 “그만둔 지 오래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2009년 여름, 해고 대상자가 아니면서도 77일 동안의 뜨거웠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옥쇄파업에 동참했던 그는 같은 해 11월 회사에서 파업 참가를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그에겐 이미 ‘강성’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해고 노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이 셋을 키워야 했다. 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월급 130만원을 받고 정육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20km..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오후였다. 그즈음 나의 머리는 미디어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온갖 죽음과 그 죽음의 서사들이 복잡하게 얽혀 한없이 무거웠다. ‘해고 트라우마’, ‘업무 스트레스’, ‘생활고’, ‘성적 비관’ 등의 범주들로 어쩌면 단순하게 분류된 죽음들은 때론 뜨거운 한탄과 함께, 때론 차갑도록 묵묵히 하나의 인간사로 미디어에 기록됐다. 한명의 인간으로 제대로 눈길조차 받지 못하던 인간들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난 뒤에야 한명의 인간으로 기록되는 지독한 역설 앞에서 나는 그저 무기력했다. 그 죽음 뒤에 가려진 서사들은 오롯이 개별적일테지만, 어느덧 하나의 보편으로 묶인 채 나를 오래 짓눌렀다. 하지만 나는 그 보편성을 어떤 언어로 규합해야 할지 선뜻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던 내게 가슴..
홍상수의 영화 가운데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들었던 건 였다. 헌준(김태우)이 강제로 성폭행을 당한 선화(성현아)의 몸을 손수 씻겨준 뒤 “내가 섹스해서 깨끗하게 되는 거야”라고 내뱉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참기 힘든 불편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홍상수의 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위악이 아니고 비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성폭행을 당한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인자한 자세로 “오빠는 괜찮아”라고 얘기하는 수컷들이 우리 주변에 산재해있지 않던가. 성폭력이 남성과 여성의 이데올로기적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사실은 수컷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소유한' 성이 침범당했느냐 여부일 뿐이다. 그래서 수컷에겐 폭력에 의해 상처받은 여성이 겪을 고통은 ..
이숙정 민주노동당 성남시의원이 성남 판교주민센터 비정규직 직원을 폭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설 연휴 첫날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던 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의원은 주민센터 직원에게 고성을 지르며 신발과 서류뭉치를 던졌고, 직원의 머리채를 잡으려 하는 등의 폭행을 저질렀다. 뉴스 동영상에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절차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활용해 보호해야 할 대상을 향해 되레 위계적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가 경직됐던 건, 이 의원이 저지른 폭력에 이 의원이 부여받은 제도적 권력, 그리고 이 의원 개인의 권위의식이 겹겹이 착종돼 있기에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소식은 더 참담했다. 이 의원은 주민센터에서 보내..
둘은 최근 가장 많은 눈길을 끌었다. 한 명은 영화를 만들어 개봉 한 달을 며칠 앞두고 누적 관객 수 237만여명을 모았다. 첫 주 127만여명을 모았던 기세는 어느덧 수그러든 모양새지만, 실패로 불리기엔 아직 이르다. 다른 한 명은 국외 원정도박으로 넉 달 남짓 ‘도피’ 생활을 하다 귀국하면서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받고 있다. 입은 옷이 ‘명품’이라며 “겸손하지 못하다”고 비판받고, 쓴 모자가 도깨비 모양을 하고 있다고 “국민을 놀리고 있다”고 야단맞았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앞은 심형래, 뒤는 신정환이다. 둘은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 심형래는 평론가들에게 평가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문화평론가 이동연은 “는 별 하나 주기도 아까운 영화”라고 혹평했고, 진중권은 심형래와 ‘심빠’..
“오늘도 엄마한테 전화하면서 울었습니다. 너무 창피하다고. 선생님이 칠판에 ‘급식지원신청서 제출’이라고 쓰시기에 가슴이 철렁했지요. 제 이름을 부르실까 봐서요. 아이들이 눈치채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요? 경험자분들 꼭 좀 대답해주세요.” “저도 이 문제로 고민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그냥 떳떳하게 가서 말하세요. 그리고 정 창피하시면, 급식비 지원 받으려고 일부러 가난하다고 거짓말했다고 하세요. 그럼 애들도 ‘와 좋겠다’ 그래요.” 2010년 12월 20일 EBS 가 방송한 ‘공짜밥’ 편에 나온 학생들의 인터넷 질의응답 가운데 일부다. 최근 보편적 무상급식을 두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몽니를 부리는 가운데 전파를 타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누리꾼들은 영상을 보고 ‘눈칫밥’ 먹는 아이들의 처지에 공감하..
문학의 텍스트와 영화의 텍스트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 엄연히 다르다는 명제는 모두에게 강박적 규범이 될 순 없다. 텍스트의 크로스오버는 그래서 그 강박에 대한 해체 시도다. “영화가 당연히 이래야지”라는 말은, 그 말의 발화자가 영화를 보기 전 이미 그 영화가 가진 내러티브를 예상하고 봤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단순히 예측 가능한 텍스트로 자발적 마스터베이션을 유도하는 도구가 된다는 건 영화에 대한 모독 아닐까, 라고 정성일은 생각한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정성일의 첫 영화 는 그래선지, 영화 그 자체의 내러티브 기법보단 문학적 텍스트의 반복적 전달 기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도입부에서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이란 말로 명..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일요일 오전만 되면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불 속에서 TV 에니메이션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태양소년 에스테반’을 봐야한다고 몽니를 부렸고, 기어이 그것들을 모두 보고난 뒤에야 목욕 가방을 들었다. 이 에니메이션들이 내게 방랑의 꿈을 키웠고, 그 꿈의 목적지를 실재로 만드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방랑의 꿈은 아주 미욱하게 이뤘을지 모르나, 목적지는 아직 가닿지 못했다. 그래도 가끔은 그 시절의 그 생각들과 그 몽니가 그립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0년 12월21일로 '친환경 전면 무상급식' 반대를 주장하는 자신의 모든 밑천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지난 18일 예정돼 있던 무상급식 관련 TV 토론을 12시간 정도 앞두고 배옥병 친환경 무상급식 풀뿌리 국민연대 상임운영위원장이 토론 상대라서 출연을 거부하겠다고 밝힌 지 사흘만이다. (사실 특정인의 출연을 전제로 그가 토론을 거부한 건 세 번째다. 조국 서울대 교수가 토론의 사회를 본다고 거절했고,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가 서울시장 후보 TV토론에 출연한다고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이틀 동안 3억8000여만원의 서울시 세금을 들여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했다. 오늘은 그의 행위의 배경이나 목적, 그리고 무상급식을 둔 전반적인 철학의 차이에 대한 사유같은 건 저리 던지고, 그가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