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듯 이번에도 시작은 느렸다. 무언가 새로운 환경이 나를 덮칠 때, 나는 그 환경에 즉자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마뜩지 않다 느낀다. 그건 아마 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인 것 같다. 새로운 환경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내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으며, 내가 그것에 종속되지 않고 그것을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려면 무엇을 사유해야할 것인가, 라는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그 환경을 선뜻 받아들이는 건 내게 별달리 의미가 없다. “시대의 조류이니 따르지 않을 수 있을테냐”라고 외치는 목소리에 “그러지 않을 수 있다”고 소리 높일 수 있는 까닭이다. 140자 이내로 내 사유를 오롯히 담을 수 있을까, 했던 것도 느린 시작의 이유였다. 내 사유가 그만큼 깊고 넓다는 게 아니라, 내 사유에 바탕한 ..
*스포일러 조금 있음 그러고 보니 거기도 술자리였다. "자, 마시자~", "건배~"로 시끌벅적했다. 술상 건너편에 앉은 85학번 선배는 89학번 선배의 눈앞에 검붉은 얼굴을 디밀고 "씨발, 니가 대체 후배들을 위해 한 게 뭐야?"라고 소리쳤다. 89학번 선배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만큼 눈이 한 움큼 풀려있었다. 흐리멍덩한 눈동자에선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하지?'라는 의아함이 읽혔다. 디지털시계는 새벽 2시를 찍었다. 그 앞에선 86학번 선배가 "아 씨발, 형 좀 그만해. 젠장할, 20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냐"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래도 85학번 선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옆에 앉았던 92학번 선배는 86학번 선배의 허리춤을 감싸 안고 "형, 그러지 말고 앉아"라고 애걸했다. ..
이재훈의 인앤아웃 no.35 인간 광우병으로 알려진 변종 크로이츠-야코브병(vCJD)의 존재는 1996년 영국 정부가 처음 발표했다. 영국 정부의 광우병자문위원회 위원인 존 콜린지 교수는 이 병의 잠복기간이 최장 30년에 이를 수 있다고 2001년 말했다. 소의 장기와 뼈, 살코기로 만든 사료, 즉 동종의 육체를 씹어 먹고 자란 소의 고기를 섭취한 사람에게 이 병이 나타날 잠재적 위험성은 잠재적이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 즉자적이면서도 가시적인 공포에 직면하지 않는 이상, 매일 밥벌어 먹으며 자신을 둘러싼 개별적 욕망의 충돌 속에 매몰된 채 벅차게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잠재적 위험성은 일상과 유리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근대 국가는 그래서 존재한다. 개인들이 인지하기 어려운 위험을 국..
이재훈의 인앤아웃 no.34 2003년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인 샤프란(44·가명)은 2008년 11월 12일 오전 10시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가구공단의 공장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가구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지 않았다. 문 앞이 술렁댔고 신분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이 공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제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사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몇 명은 수갑을 지니고 있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샤프란은 후문으로 내달렸다. 단속반원이 팔을 잡아챘고, 샤프란은 이를 뿌리치다 4m 높이의 계단에서 굴렀다. 단속반원이 그 위를 덮쳤다. 오른발 뒤꿈치는 금이 갔고 왼쪽 무릎뼈는 부러졌다. 몸을 옹송그린 그에게 단속반원은 수갑을 채웠다. 호송버스에서 그는 통증을 호소했지만 "꾀병 부리지 말고..
'뉴타운 컬처 파티 51+' 현장 르포르타주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4번 출구로 나와 100m쯤 걸어가면 나오는 동교동 167번지 일대는 땅이 푹 꺼져 있다. 땅은 일대의 고층 건물 숲을 받히는 콘크리트 바닥과 어울리지 않게 흙과 모래의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땅에 덩그러니 섬처럼 서 있는 3층 건물이 있다. 톱으로 잘라낸 듯 거친 시멘트 단면을 드러낸 채 곧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선 그 건물에는 철거대상 딱지가 붙어있다. 대신 인천공항으로 가는 경전철역이 들어설 예정인 탓이다. 5월 1일, 그 건물 앞마당에 사람들이 5100원 혹은 1만 2000원을 내고 모였다. 풍덩한 천을 옷 삼아 몸 아래 위를 두른 남녀, 머리를 땋은 외국인 남자, 올이 나간 스타킹을 입고 헌옷과 책을 좌판 하..
이재훈의 인앤아웃 no.33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고3 1학기 중간고사 때였다. 혈압이 높고 심장이 약했던 그는 심근경색으로 돌연사했다. 좁은 마당에 천막이 내걸렸다. 문상객이 올 때마다 아버지는 울었다. 아버지는 처음 눈 콧물과 함께 울었지만 한나절이 지나고부턴 소리로만 길게 울었다. 아버지의 울음은 점액질을 잃어가는 만큼이나 감정도 메말라가는 듯했다. 문상객들은 아버지의 손을 어루만지며 황망해한 뒤 곧 고기국밥을 우걱우걱 먹었다. 그리곤 소주를 마시거나 화투를 치며 떠들썩하게 놀았다. 나는 문상객들과 아버지를 잃은 내 아버지가 슬픔을 금세 지우는 모습에 난감했다. 열여덟의 나는 장례라는 절차가 죽은 자보다 산 자를 위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문상객의 고성방가가 피붙이를 잃은 이의 공허함을 달래려..
이재훈의 인앤아웃 no.32 그의 아버지는 시골의 실업계 학교 교사다. 혈압 탓에 몸이 불편해선지 아버지는 요즘 흰 머리가 부쩍 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평소 별로 말이 없다. 늙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래서 눈 대중으로 짐작만 가능하다.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이 교원단체 명단을 공개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명단을 훑어봤다. 아버지의 이름 옆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역시 말한 적이 없었다. 곧 정년 퇴임이니 별일이야 있겠나 싶으면서도 걱정이 된다. 그는 "오늘 집에 소주라도 한 병 사가지고 가야겠다"고 했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법의 판결을 무시하고 교원단체 명단 공개를 강행했다. 공개 이후 반응은 엇갈렸다. "전교조라는 게 떳떳하다면 왜 공개를 꺼리느냐"는 ..
채 꽃펴보지 못한 젊음들이 의무와 법의 강제란 이름으로 집총했다가 차가운 물속에서 하나 둘 스러져 갔다. 익히 예상은 했지만 사고 이후 한동안 뿌옇게 부유했던 죽음은 함미가 인양되고 주검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더 이상 부인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실체가 되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어야 했던가. 그 물음에 대답해야할, 그들을 차출했던 국가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런 와중에 침몰 사고의 원인과 정부의 대처에 대한 온갖 의혹과 정치적 해석이 난무하고 있다. 보수 신문은 사건 초반부터 별다른 근거도 없이 북한 공격설을 제기하며 안보를 상업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익히 예상했던 대로다. 반면 진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안보 상업주의의 대척점에서 북한 연계설의 여론 확장을 막는 안티로서의 존재감..
이재훈의 인앤아웃 no.31 그는 20년 삶을 간단하게 돌아봤다. 초등학교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살아왔고, 결국 남들이 명명하는 '명문대'에 합격했다.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당연한 줄 알았다고 했다. "이미 주어진 하나의 정답 앞에 물음은 의미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문득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왜 친구들과 전부 똑같은 것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지, 왜 수많은 아이들이 패배자가 되어야 하는지, 왜 이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야하는 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신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에 대한 첫 회의였다. 회의 끝의 선택은 강요된 이데올로기, 즉 명문대에서의 이탈이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선언을 남기고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24)씨는 이후 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