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을 기다렸지만 신은 그에게 44분만 허용했다. 평생 늘 머리 속에 그렸던 결정적인 골키퍼 1대1 찬스도 있었지만 신은 다시 한 번 폭우를 내려 그의 축발을 흔들어놨고, 골키퍼를 스치며 골대로 향하던 공의 속도도 줄여놨다. 2002년 충격의 대표팀 탈락, 2006년 불의의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12년 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동국(31)의 간절했던 월드컵 도전은 그렇게 끝났다. 이동국의 도전은 한국 축구의 도전사와 궤를 같이 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0-5로 대패하며 한국 축구를 좌절시켰던 네덜란드 전에서 후반 34분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세계 최고의 골키퍼 에드윈 판데르 사르(40)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19살의 이동국은 좌절을 딛고설 한국 축구의 미래였다. 하지만 실패한 한국 축구가..
이재훈의 인앤아웃 no.40 그들은 4년마다 한 번씩 나타난다.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붉은 옷을 입고 광장에 나와 "대~한민국"을 외친다. 언론은 그들 앞에 모여 연방 사진을 찍는다. 이상한 건 늘 사진 속 그들 주변엔 얼굴에 희한한 페인트 칠을 해 공격적 마초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 남성들이 배치된다는 점이다. 거친 남성들의 대척점에 서야 '가냘퍼야만 하는' 그들의 여성성이 한껏 부각되기 때문일까. 그렇게 그들은 '똥습녀', '상암동녀', '아르헨 구둣발녀' 등의 호명을 통해 자신이 드러낸 과잉의 표현 수준만큼이나 비슷한 대중의 관심을 얻는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묘한 균열이 생기고 있다. 많은 이들이 '월드컵녀'가 뜨면, 그들이 과연 어떤 연예기획사에 소속돼 있는지부터 추적..
이재훈의 인앤아웃 no.39 5년 전 한 선배의 소개로 만난 재일교포 3세 김향청(33)씨의 글을 읽게 됐다. 김씨의 할아버지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1912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령 때 생활수단을 잃고 만주를 거쳐 일본에 정착했다. 식민지 때 할아버지는 한반도에 살든 일본에 살든 '일본인'이어야 했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할아버지는 '외국인'이 됐고, 일본 정부는 1947년 할아버지의 외국인등록증에 '조선'이라고 표기했다. 당시는 남한도 북한도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조선적(朝鮮籍)이 탄생한 배경이다. 현재 대략 7만여 명의 조선적 교포가 일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이 수교를 맺으면서 많은 이들이 표기를 '한국'으로 바꿨다. 하지만 김씨와 가족들은 조선적을 ..
지방선거의 여운이 여전하다. 1998년 이후 4년마다 지방선거와 공존해온 월드컵이 11일 개막했지만, 10여 일 전 있었던 선거 관련 담론은 끊이지 않고 있다. 월드컵 열풍에 가린 지방선거 투표율이 선거 때마다 걱정거리였음에도 이번 선거는 1998년 이후 가장 높은 투표율로 그런 우려를 덮어 버렸다. 나는 문화비평가 이택광의 분석에 기대 이번 선거가 보인 징후에 2002년 월드컵 이후 변화해온 한국 사회 대중들의 주체성이 한 몫을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상상 속에서 간절히 바랐던 쾌락을 현실화해준 '대~한민국'이란 '정상국가'의 이미지는, 대중에게 자신들을 만족시켜주지 않거나 자신들의 즐거움을 앗아가거나 혹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는 '비정상국가'에 대한 거부감을 자연스..
이재훈의 인앤아웃 no.38 2003년 개봉한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가부장적 가족문화와 유교 사회의 엄숙한 도덕주의로 포장됐던 조선시대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공연한 편견에 균열을 일으켰다. 정숙했을 것이라고 믿어온 사대부 집안의 조씨 부인(이미숙)과 그의 사촌인 조원(배용준)이 9년째 수절중인 숙부인 정씨(전도연)를 꼬드길 수 있는지를 두고 내기를 걸다니. 영화는 조씨 부인과 정씨가 첫사랑 관계라는 점에서 근친상간 금지라는 둘의 관계 내부적 금기와 숙부인이 지켜야할 수절의 가치라는 외부적 금기를 함께 깨부수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그려냈다. 하지만 놀라웠던 건 이런 텍스트를 별다른 거부감없이 받아들인 한국 사회였다. 70~80년대에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성균관 유림회가 들고 일어나지 않았을..
2002년 이후 4년마다 월드컵이 오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몸이 발그스레 달뜬다. 2002년 이전의 월드컵은 덩치 큰 동네 형들과 싸우러 나갔다 잔뜩 매 맞는 우리 형을 보는 기분이었다. 늘 위축됐고 한탄스러웠고 지레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2002년부턴 달랐다. 한신대 김종엽 교수는 이 감정을 두고 "2002년 한국 대표팀의 연이은 승리가 준 일종의 외상적인 체험으로 쾌적한 만족과는 상이한 어떤 한계의 돌파로부터 밀려든 과도한 쾌락, 일종의 희열"이라고 분석했다. 그랬다. 과도한 쾌락에 잔뜩 달뜬 사람들은 자신의 한 몸으로 오롯이 감당할 수 없는 폭발적 흥분을 분출하기 위해 광장으로 달려나와 남 보란듯이 "대~한민국"을 외쳐댔다. 광장에는 그래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군집했다. 한국 근대 사회에서의 광장..
월드컵을 앞두고 상상해보는, 아마 불가능할 어떤 것들. 1. UN이 FIFA와 연합해 앞으로의 모든 마초적·산업적·민족적·종교적·탐욕적인 이유로 벌어지는 전쟁은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축구로 한 판 맞장뜨게 하기. 영국의 네 가지 축구협회별 참가 허용처럼 한 국가 내 민족별 축구경기도 월드컵 2부리그서 포용 가능하게 만들기. 2. SBS가 포털과 아프리카, 다음팟과 트위터 등 모든 네트워크 도구를 통해 월드컵 경기 모두 무상 방송하기. 거리응원과 각종 호프집 방송도 무료 공개하기. 어차피 광고로 수익 얻을 거니까. 3. 거리에 나올 월드컵 응원 인파를 두고, '국가에 충성하는 한국인들의 군집'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사람들 더 이상 없기. 국가에 충성하는 게 아니라 IMF 이후 하등 도움된 적이 없던 국가가..
이재훈의 인앤아웃 no.37 뚜껑을 열고 실제 받아 안은 민심은 예상과 달랐다. 한나라당은 참패했다. 2008년 5~6월 이명박 대통령에게 경고장을 보냈던 촛불 민심은 꺼지지 않은 채 잠재하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촛불은 대의제를 통해 맡긴 권력에게 민심과 괴리되지 않은 정책을 통해 '정상국가'를 운영해가라는 목소리이자 권리 주장이었다. 촛불 시위대는 이 정부가 명박산성을 쌓고 더 이상 목소리를 들으려하지 않자 촛불을 끄고 일상으로 돌아간 뒤 2년을 꾸준히 기다렸고, 역시나 '정상적인' 대의 민주주의의 방법론으로 일방통행 국정운영에 제동을 걸었다. 이런 점에서 50%에 육박했다던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마저 민심을 반영하지 못한 여론조사의 허상이 아닐까 싶다. 촛불 이후 이번 정부가 각종 사법 권력을 ..
고백하건대, 안달했다. 지난 주쯤부터였다. 선거가 임박하고 응답률도 미욱한 여론조사 결과가 '위기'를 조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후보 단일화'를 위한 압박이 이어졌다. 왠지 안달이 났다. 그렇다고 '후단'에 대한 반박도 뚜렷하게 말하지 않았다. 프레임에 엮이지 않아야 한다, 싶어서였다. 그리고 30일,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가 사퇴하고 유시민 후보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조장된 '위기'에 덧대 안달했던 나는 드러내놓고 우울했다. 하지만 내 안달과 우울은 그저 자기만족과 자기 위안에 불과했음이 곧 까발려졌다. 각성은 한 선배의 말 한마디로부터 왔다. 부끄러워 잠시 고개를 떨궜다. 무언가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거나 혹은 긴장없이 겉으로만 대충 개입하면 '철저히 개입하면서 적절한 거리두기'로 다가갈 수 있는 ..
이재훈의 인앤아웃no.36 1996년 4월5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양형섭 의장이 "한반도 전쟁은 시간문제라 위협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정부는 대북 정보감시 체제를 워치콘2로 강화했고, 미국은 북한에 "정전협정을 준수하고 도발행위를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이튿날 북한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 중무장 병력을 투입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으며, 공로명 외무부장관은 주한 미국 대사와 한.미 공조를 논의했다. 9일엔 공동 대응책 협의를 위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틀 뒤 15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고,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139석을 얻었다. 과반에 11석 모자란 승리였다. 14년을 건너뛴 20일, 한나라당 정부는 천안함 사건을 "북한의 소행"이라 결론짓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