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인앤아웃 no.30 신동기(33)씨는 붉은 조명의 정육점에서 고기를 썰었다. 고기를 잡는 왼손도 칼을 든 오른손도 어색했다. 바투 깎았던 머리칼은 한 움큼 자랐고 최루액이 들어가 핏발이 섰던 왼쪽 눈은 제 색깔을 찾았다. 한 달에 130만원가량 받아 부인과 세 자녀를 키운다고 했다. 요즘도 가끔 잠을 자다 놀라 벌떡 눈을 치뜨면 부인이 몸을 쓰다듬으며 달랜다. 신씨를 만난 건 쌍용자동차 옥쇄파업이 막 끝난 지난해 8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정리해고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리해고 대상자들과 함께 77일 동안 공장을 지켰다. 눈을 질끔 감으면 업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답은 명료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죠. 인간적인 도리까지 저버리면서 돈을 벌라면, 차라리 도둑질하고 맙니다. 똥을 ..
쌍용자동차 투쟁 다큐 영화에 대한 작은 보고서 2008년 초여름은 광우병 쇠고기를 반대하는 촛불로 뜨거웠다. 10대부터 노년층까지 시민들은 광화문에 꾸역꾸역 모였다. 21년 만에 100만명이 군집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분석과 해석이 난무했다. '저들의 군집화를 이끈 동력이 과연 무엇일까'가 관건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달리 이번 촛불은 군사정권과 같은 명확한 투쟁의 대상이 없지 않느냐'가 고민의 시작점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분석의 틀을 금세 찾아내 공격 대상을 정하고 탄착점을 포착했다. '분명 저들을 이끈 배후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다. 대통령은 "저 양초들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하는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집회를 '주도..
이재훈의 인앤아웃 no.29 한국은 평등주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했던 국가다. 1960~70년대 새마을운동의 구호는 '다함께 잘살자'였다. 모두가 최저생존권조차 갖추기 힘들었을 때 이 구호는 강력했다. 나의 이익보다 '조국'의 발전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면 모두가 잘 살게 되리란 믿음이 그땐 있었다. 야간 통금과 장발 단속 등 일상적 자유에 대한 억압은 평등의 가치에 대한 신화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70년대 초반 고교평준화 실시, 개발제한구역 설정 등과 같은 국가 제도는 평등의 가치를 전유하기 위해 등장했다. 하지만 70~80년대를 거치며 기승을 부린 부동산 투기붐은 평등의 신화가 해체되는 시작점이었다. '다함께 잘사는' 세상은 온전히 오지 않았다. IMF 구제금융 이후 신자유주의..
이재훈의 인앤아웃 no.28 지난해 10월부터 지하철과 보행로 곳곳엔 '우측통행' 게시글이 붙어있다. 국가는 '보행속도 증가'와 '심리적 부담 감소', '보행자 안전'과 '글로벌 보행문화 정착' 등을 시행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 나가보면 우측보행을 엄숙히 따르며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들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좌측보행이 왜 우측보행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들마저 그다지 없다. 왜 그럴까. 국가가 명령을 내리면 무조건 따라야만 전체가 발전할 것 같던 때가 있었다. 긴 머리를 자르라면 잘라야했고, 미니스커트를 입지 말라면 입지 않아야했다. 긴 머리와 미니스커트가 왜 국가 발전에 방해가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강력한 국가의 ..
2005년 초여름 한국은 '삼순이 열풍'에 몸살을 앓았다. 몸은 뚱뚱하고 이름은 촌티가 흐르는 여자. 결혼과 현실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해야' 한다고 강요받는 서른 살 여자란 시기적 비주류성에다 고졸 학력을 갖췄고 편모슬하이기까지. 갖춘 거라곤 날카로운 언변과 누구 앞에서도 꿀리지 않는 당당함 뿐이다. 하긴 그 두 가지마저 여자가 가지면 한국 사회에선 그다지 장점이 되지 못한다. '못 생긴 게 성질까지 더럽다'는 소릴 듣기 딱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순이는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지지의 바탕엔 두 가지 까닭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 '루저'인 그녀가 '밀땅' 연애를 하는 대상이 바로 얼짱에다 재력까지 갖춘 대표적인 엄친아 '삼식이'였기 때문이다. "삼겹살 출렁이는 주제에 감히 우..
이재훈의 인앤아웃 no.27 "제가 감옥버스를 타려할 때 절 부르셨죠. 야첵! 이라고. 전 스물한 살이나 먹었는데 절 부르는 소리에 눈물이 났어요", "재판할 때도 여러 번 불렀지 않나", "그 전엔 들리지 않았어요. 그땐 모든 사람이 절 비난하고 있었으니까." 영화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야첵은 별다른 까닭 없이 택시기사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끝내 사형 당하고 만다. 어린 시절 여동생의 죽음으로 강한 트라우마를 안게 된 그는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킨 채 자기 안의 세계에서만 살았다. 외부의 요인에 의해 생긴 충격을 다시 받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방어적으로 온몸을 옹송그렸다. 하지만 내부로의 고립이 점점 깊어질수록 살아야할 이유는 점점 상실하게 됐다. 아무 잘못 없는 택시기사를 살해하고도, 야첵은 ..
이재훈의 인앤아웃 no.26 꽃다운 13세 소녀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빈집에서 성폭행당하고 무참히 살해됐다. 범죄의 잔혹성과 제대로 피어보지 못한 소녀에 대한 안타까움에 전국이 들끓었다. 피의자 김길태(33)씨는 10일 체포된 뒤 경찰에 압송되는 과정에서 1000여명의 시민에게 증오가 담긴 욕설을 들었다. 한 시민은 그의 뒤통수를 내려치기도 했다. 김씨의 DNA와 소녀의 시신에서 발견된 타액의 DNA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가 범인일 확률은 95% 이상이다. 경찰은 자백으로 남은 5%를 채우려 할 것이고, 죄의 확정은 증거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릴 법원의 몫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압송 과정에서 김씨의 얼굴이 공개된 것에 논란이 일었다. 20명의 노인과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연쇄살인범 유영철(40)도 200..
게임중독 부부와 아이살해 여성에게 떠맡긴 공동체 윤리의 비도덕성 게임에 빠져 태어난 지 석달된 딸을 집안에 방치해 굶어 죽게 한 부부가 수원 경찰에 구속됐다. 부부가 매일 하루 4~6시간 정도 즐긴 게임이 가상의 세계에서 소녀 캐릭터를 키우는 종류라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받아들여졌다. '게임중독'이 단박에 검색 키워드가 됐고, 부부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경찰은 "자기 자식이 우선이지, 내 자식은 굶고 있는데 인터넷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우는데 빠져 내 자식을 굶어 죽게 했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며 법적인 재단 외에 '일반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도덕적 비난에 가세했다. 하지만 내겐 '게임중독'과 '친딸을 저버리고 키운 가상의 딸'이란 키워드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숨진..
이재훈의 인앤아웃 no.25 4년 만에 만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아이들은 여전했다. 파리한 몸에 걸친 옷은 남루했고 흙 때가 까맣게 낀 손톱엔 핏기가 없었다.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빛을 잃고 있었다. 아이들은 물기없는 입술을 옹송그리며 나무 피리와 팔찌, 손톱깎이와 비단 천, 복제 책과 기념 티셔츠를 들고 저마다 자기의 물건을 사달라고 호소했다. 여전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4년 전 2개에 1달러이던 가격은 1개에 1달러로 뛰어 있었다. 영어로 "선생님, 2개에 1달러에요"라고 말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한국말을 배워 "오빠, 하나만 사. 손톱깎이. 천원"이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1000원짜리 지폐를 들고 흔드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오빠'란 단어에서 잔뜩 이물감이 들었다. 일용노동자 하루 ..
에서 본 개별적 주체에 대한 기대 대상에 대한 호명에는 대상에 대해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신화가 담긴다. '명품'으로 호명되는 각종 고가 브랜드 제품들이 한 예다. 명품 소비자들은 제품의 실질적 사용가치보다 명품을 소유함으로써 타자보다 우월한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대중의 신화를 소비하는 데 기꺼이 막대한 돈을 지불한다. 그런 신화의 단면이 '짝퉁'이다. 짝퉁을 산다는 건 명품의 '정당한' 가치라고 믿어지는 만큼의 돈을 지불하지 않고 브랜드의 '객관적 신화'만 툭 떼어내 소유하고자 하는 행위다. 하지만 짝퉁을 산 사람 가운데 자랑스레 "나 짝퉁 샀어"라고 말하는 이가 드물 듯 짝퉁 소비자들은 명품의 가치가 '신화적'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대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