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르는 사람이라예.” 사진을 보자마자 얼굴을 흔들고 고개를 숙였다. 단호한 말투였다. 필요 이상으로 단호했다. 하얀 야구모자 아래 숨은 눈빛은, 사진을 보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똑같이 답한 수십 명의 시장 상인들이 내비쳤던 의아함과 달랐다. 당혹감이었다. 곧 두 눈이 촉촉해졌고,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러자 호기심에 사진을 보기 위해 모인 상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흩어졌다. 이제 그녀만의 시간이 남았다. 상인들은 개입할 수 없었다. ★ 2007년 12월 2일 한국방송 TV에 한 청년이 출연했다. “진짜로, 살려주이소”라고 말을 꺼냈다. 17분 동안 연설했다. 그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다고 했다. “2002년 치른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찍은 어..
아비는 목에 턱받이 손수건을 둘렀다. 어미는 두어 개 남은 아비의 치아에 아래 위 틀니를 끼워 넣었다. 아들은 밥을 국에 말았다. 아비는 덜덜 떨며 입을 벌렸고, 아들은 수저에 뜬 밥을 아비의 입에 밀어 넣었다. 아비가 입을 오므릴 때마다, 입가엔 잔뜩 주름이 어렸다. 움푹 팬 뺨이 밥을 씹을 때마다 더 우물졌다. 아들은 힘겹게 밥을 넘기는 아비를 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아비도 밥을 씹으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쓴 아비와 아들은 미간의 똑같은 자리에 비슷한 모양의 세로 주름을 그렸다. 주름의 깊이가 달랐다. 아들의 찌푸림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면, 아비의 찌푸림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는 점도 달랐다. 병원 식당가의 다른 자리엔 다섯 가족이 둘러앉았다. 일흔은 훨씬 넘어 보이는 여성..
한국일보 투쟁 현장에 다녀왔다. 서울 남대문로 한진빌딩 15층에 있는 한국일보 편집국은 6월 16일부터 '짝퉁 한국일보'를 만들고 있는 예닐곱명의 부장단과 사측이 동원한 용역들이 '셀프 감금'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조를 나눠 교대해가며 통로에서 이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순번이 아닌 기자들은 여전히 자신이 맡은 출입처나 취재 현장에서 브리핑 등에 참여하거나, 1층 로비 혹은 3층 노조 사무실에서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신문 제작 프로그램에 로그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브리핑 참여는, 기자들이 여전히 노동을 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빙이다. 사측의 입장에 따라 짝퉁 한국일보를 만들고 있는 부장들은 며칠째 집에도 가지 않고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며 연합뉴스 기사를 베끼고 있다고 한다..
신념이 자유의 언어라면, 책임은 공유의 언어다. 자유는 오롯이 나의 것이다. 나의 신념을 외부에 의해 간섭받지 않는다. 만약 외부의 간섭이 있다해도, 그 간섭은 나의 사유를 거쳐 나의 윤리로 정립되면서 나의 신념으로 다시 변증한다. 반면 책임은 나만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임은 관계 속에서 이뤄진 행동이나 관계를 규정짓는 권력의 작동으로 인해 파생된 어떤 결과를 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책임은 나와 너의 관계 위에 걸친 채 공유된다. 유시민이 지난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트위터(@u_simin)에 쓴 표현은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난다”였다. 는 독일의 사회학자 맑스 베버가 펴낸 책 이름이다. 베버는 책에서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조화를 거론하면서, 신념윤리보다는 책임..
1년 전 이맘 때 나는 경북 구미에 사흘 동안 머물며 20대와 30대 노동자 5명을 인터뷰했다. 5명은 모두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부분 생산직이었으며 중소 공장에서 일했다. 구미는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율이 80.3%나 됐지만, 당시 인터뷰이 5명 가운데 박 후보를 적극 지지하는 이는 1명뿐이었다. 그 1명마저 파업을 ‘노조 이기주의’로 보는 시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일요일만큼은 쉬게 해달라’는 말을 사회에 던지고 싶지만, 주변에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토대가 없다. 진보정당은 그들과 접점이 없거나, 아예 없는 존재였다. 진보정당을 알고 있는 20대도 “그들은 노동권 문제를 개선할 힘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들은 정치에 무감한 듯했으나, 적어도 정..
공지영이 쓴 는 발행 두 달 남짓 만에 10만 부가 넘게 팔리며,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널리 알리고 있다. 이 책은 7년이 넘도록 복잡하게 이어져온 쌍용차 사태의 맥락과 사실 관계를 어느 정도 충실히 담은 한 권짜리 텍스트다. 그렇기에 줄지어 숨을 거두는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해 단순한 동정의 시선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 함께 분노해야 할지 그 팩트를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풀리기 어려워 보이는 굴레도 안고 있다. 쌍용차 사태와 관련해 하종강과 이선옥이 이미 매체에 게재한 글을, 공지영이 에 인용된 여러 글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용’했다는 논란이다. 다른 인용 글과 달리 본문에 인용 표기가 전혀 없다. 책 뒷부분 ‘출처 및 참고자료’에 하종..
언젠가부터 언론에 ‘통합’이란 단어가 부쩍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국민’과 ‘대(大)’가 붙어 ‘국민 대통합’이란 수사가 주로 쓰인다. 이 단어의 쓰임에는 속내가 담겨 있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할 국민이 이념이나 세대, 계급의 차이로 나뉘어 갈등하는 것은 소모적이라는 관점이다. 비슷한 까닭으로 ‘소통’이란 언어가 한참 통용되더니, 선거를 앞두고는 보수든 진보든 한목소리로 통합을 말하며 갈등을 치유하고 하나 된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막말 파문’으로 인선되자마자 여론에 뭇매를 맞고 있는 윤창중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에 대한 비판에서 가장 많이 보인 단어도 국민 대통합이었다. 민주 진보 진영의 다수는 “국민 대통합 시대를 열겠다”는 박근혜 당선인의 말과 ‘극우’ 윤창중..
며칠 전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트위터에 사진을 올렸다. 박근혜 지지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박정희와 육영수의 영정을 앞에 두고 큰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진 교수는 “혹시 이런 미래를 원하십니까?”라고 썼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이 모습이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미래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여전히 박정희를 신성화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도, 2012년의 한국 사회에서 이런 모습이 일반화하리라 상상하는 건 무리수다. 진 교수도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25년 동안 진화한 한국의 민주화는 이미 하나의 문화로 공고화해 있다. 그런데 이런 지적을 하며 “문재..
정기구독 신청 “덕후와 잉여라는 주체를 관통하는 공통된 흐름은 소비중심주의적 주체입니다. 생산중심주의 사회에선 배제되던 존재들이죠”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개인화·파편화하면서 기성세대 관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주체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주체와 양식이 ‘덕후’와 ‘잉여’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사전을 보면 덕후는 ‘어떤 분야나 사항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열중하며 집착하는 사람’을 일컫는 일본어 ‘오타쿠’의 한국어 변용이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잉여는 ‘사회에서 인정을 못 받아서 인터넷상에서 온갖 찌질한 짓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인간’이라고 설명돼 있다. 덕후는 1990년대 한국 사회가 문화적 다양성을 조금씩 확장하면서 소비주의를 중심으로 주체와 양식을 차츰 외화했다..